핑크호수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by 여행하는 과학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끄럼 없이 하던 이야기가 있었으니, 여행을 바탕으로 책도 쓰고 방송에도 출연하겠다는 야심찬 희망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었다. 브런치를 통해서 받은 두 번째 제안 메일. 세계테마기행 출연 제의였다. 메일을 처음 열어보았을 때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정도였으니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오케이다.


시작은 심장이 팔딱이는 황홀함이었, 준비 기간 동안에는 마어마한 불안함과 담감이 있었다. 촬영 중에는 하루가 이틀 삼일인 것처럼 많은 일들이 휘몰아쳐, 매일 달력을 보며 날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신 차려보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 있었고, 하루에 일출도 보고 산도 타고 바다에도 들어가고 별도 봤다. 제작팀에서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셨던 것이 "매우, 정말, 굉장히 힘들 것이다"였는데,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보통의 여행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여행. 그 기행을 남긴다.




서호주 퍼스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 1시, 입국수속을 마치고 숙소에 누운 것은 새벽 3시쯤. 불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언가 팔을 기어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어. 엄지손톱만 한 벌레를 털어내면서 비명이 절로 나왔지. 난리법석을 떨면서 간신히 수건으로 눌러 죽인 후에, 아고다에서 숙소 후기를 찾아봤어. 바퀴벌레가 나왔다는 후기가 세 개나 있지 뭐야. 나는 모기를 잡을 때조차 벌벌 떠는 사람이라 첫날부터 거의 밤을 새우고 말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 정은 600km쯤 는 장거리 이동이라 차 문에 머리를 박아가며 졸 수 있었어. 피디님, 카메라감독님, 그리고 나. 달랑 셋이 다니는 여행이라 번갈아 운전하시는 두 분께 너무 죄송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깨어 있는 척 안간힘을 쓰는 것도 포기하고 그냥 자게 되더라.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났을 때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렸어.

"저기는 왜 하늘이 빨갛지?"


노을이 질 때의 주황빛도 아니고 비 오는 날의 우중충한 갈색 구름도 아니었어. 빨강에 가까운 핑크빛. 하늘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었어. 곧 땅에서도 진한 핑크색이 보였어. 아주 넓게 펼쳐진 핑크호수. 햇살과 구름의 기묘한 조화 덕분에 붉은 호수의 색이 오묘하게 하늘에 비친 거였어.


며칠 뒤 핑크 호수에 다시 들렀을 때 호수의 색은 여전했지만 핑크 하늘은 볼 수 없었어. 그제야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진풍경을 만났던 거구나 깨달았지. 첫 날 잠이 덜 깨서 창문도 못 연 채 되는대로 셔터를 른 핑크 하늘이 호주에서 찍은 첫 번째 사진이야.



핑크 호수의 비밀, 두날리엘라 살리나


호주에는 유독 붉은 호수가 많아. 우리가 만난 헛라군도 호주의 유명한 핑크 호수 중 하나야. 염도가 아주 높기 때문에 얕은 호수 바닥에 재결정된 소금이 뾰족하게 쌓여 있지. 뜨거운 호주의 햇살 때문에 증발되는 물이 많았을 거야. 이 짜디짠 소금물에서도 생명체가 살아. '두날리엘라 살리나'라는 단세포 조류는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인데, 핑크 호수처럼 염도가 높은 물에 서식해.


뜨거운 햇살은 광합성에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지만, 에너지가 큰 자외선은 물 분자를 분해하거나 산소 분자의 전자를 들뜨게 해서 활성 산소를 만들어. 활성 산소는 다른 물질들을 산화시키려는 반응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DNA 같은 세포 내 분자들을 손상시키거든. 과도하게 생성된 활성 산소는 암이나 노화를 일으키는 주범 중 하나야.


세포는 똑똑하게도 활성 산소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어. 항산화 물질이라고 총칭되는 것들이야. 항산화 물질은 활성 산소를 분해해서 없애거나, 활성 산소가 다른 반응을 일으키도록 도와서 세포 내 분자들이 손상되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을 해. 우리 주변의 흔한 색소인 카로티노이드도 항산화 물질 중 하나야. 빨강, 주황, 노랑 같이 예쁜 색을 띠는 색소군인데, 단풍잎, 토마토, 당근처럼 붉은 생명체들은 카로티노이드를 많이 가지고 있어.


핑크 호수에 살고 있는 '두날리엘라 살리나'는 베타 카로틴을 품고 있어. 빨간 당근이나 고추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카로티노이드야. 에너지가 큰 빛을 흡수해 주기 때문에 활성 산소가 덜 만들어지는다가, 이미 생성된 활성 산소를 안정한 화합물로 변화시키는 역할까지 해. 쨍쨍한 자외선 아래에 놓여 있는 호주의 헛라군에서 두날리엘라 살리나가 번식할 수 있는 이유이자, 호수가 붉은색을 띠는 이유야. 두날리엘라 살리나는 단세포 조류라서 당근이나 고추보다 배양도 쉽고 중량 대비 카로티노이드 함량이 높기 때문에 건강 보조 식품이나 노화 방지 화장품 재료로 연구되고 있어.


극한 환경에서도 생명체들은 어떻게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나가. 그리고 과학자들은 대자연 속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인류의 인생 여정을 길게 늘려나가지. 그 틈에서 어떻든 우리의 여행도 계속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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