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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Sep 19. 2018

신혼여행지에서도 논문 썼던 과학자, 닐스 보어

양자역학의 아버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제품의 핵심부품인 반도체 칩의 발견은 원자 이하의 아주 작은 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양자역학이 없는 현대 물리학을 상상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를 개척한 사람으로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1885~1962)가 있습니다.


1935년 닐스 보어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제품의 핵심부품인 반도체 칩의 발견은 원자 이하의 아주 작은 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양자역학이 없는 현대 물리학을 상상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를 개척한 사람으로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1885~1962)가 있습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통해 화학결합을 훨씬 폭넓게 설명하게 되었고, 우주의 기원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어는 어떻게 양자역학으로 학문을 넓히게 된 것일까요?





이론이 안정하지 않던 원자의 안정성

닐스 보어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1911년 보어는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에서 금속 내 전자 이론을 확대해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어는 맥스웰 방정식으로 대표되는 고전 전자기학만으로는 금속 내 전자의 움직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보어는 전자의 발견자인 조지프 존 톰슨(1856~1940)과 함께 연구하기 위해 박사 연구생 자격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로 갑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이던 톰슨은 보어를 친절하게 대했지만 보어의 서툰 영어로 인해 소통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보어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와 대화하려면 많은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보어는 톰슨과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어는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어니스트 러더퍼드(1871~1937)에게 갔습니다.



당시 러더퍼드의 연구실에선 알파입자를 금박지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통해 원자의 질량 대부분이 원자핵에 몰려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원자핵 주위를 전자들이 돌고 있다는 원자모형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안정한 상태의 원자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고전 전자기학 이론에 따르면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는 전자기파를 방출하고 점점 에너지를 잃어 원자핵을 향해 나선 운동을 하다가 원자 핵과 충돌해야 했습니다. 고전 이론과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에 따르면 원자는 아주 불안정한 상태로 밖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에서 원자는 매우 안정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왜 그럴까요? 보어는 바로 그 이유를 밝히고 싶어졌습니다.





전자가 궤도 바꿀  빛을 방출한다

닐스 보어(오른쪽)와 마르그레테 뇌를룬(왼쪽)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보어의 원자모형 by JabberWok CC-BY-SA-3.0(Wikimedia commons)



1913년 보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에 플랑크의 양자이론을 적용했습니다. 고전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은 본질적으로 확실성이 아닌 확률론입니다. 에너지를 비롯한 물리량이 연속적인 양으로 존재하거나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양의 정수 배로 만 존재하고 주고받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보어는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제안한 빛의 양자와 원자 안에서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의 에너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어는 1912년 8월 마르그레테 뇌를 룬과 결혼했습니다. 노르웨이로 간 신혼여행에서도 보어는 알파입자의 흡수 이론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보어가 내용을 불러주면 마르그레테가 깔끔한 글씨로 초고를 쓰면서 보어의 부족한 영어를 채워주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 마르그레테는 평생 보어의 공식적인 비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보어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상상하면서 원자의 안정성, 원자가 내는 스펙트럼, 그리고 주기율표에 나타난 원자의 주기적 성질을 설명할 수 있는 원자모형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1913년 초 보어는 우연히 발머계열에 관한 식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원자 내의 전자들이 양자화된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궤도만을 허용한다는 자신의 원자모형을 도출합니다.



1913년 7월부터 11월까지 보어는 20세기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문 3편을 잇따라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논문은 수소 원자에 대한 것이었고, 나머지 두 논문은 수소보다 더 무거운 원자의 구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보어는“양자의 방출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옮겨가는 전자의 도약과 일치”한다며 수소 원자가 빛을 방출하는 이유는 전자가 궤도를 바꿀 때 빛을 방출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어가 제안한 원자모형은 모든 원소의 원자구조를 새롭게 이용하는데 활용됐습니다. 보어의 원자모형은 뒤에 ‘제1차 양자 혁명’으로 불렸습니다. 1차라는 말은 보어의 원자모형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조머펠트, 막스 보른 같은 과학자들은 보어의 원자모형에 대해 회의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습니다.



보어는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의 원자모형을 꾸준히 보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925년까지 그 문제점을 스스로 앞장서 해결하는 이른바 ‘제2차 양자 혁명’을 주도합니다. 처음 보어가 제안한 원자모형은 전자들이 2차원 궤도 위에서 원자핵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어는 이 원자모형의 한계를 인정하고 3차원적인 전자배치를 지닌 새로운 원자모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22년 노벨물리학 상을 수상합니다.





암모형  아저씨 불리운 사나이

1931년 핵물리학총회에 참석한 닐스 보어(아래 오른쪽에서 네 번째)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1930년께 보어는 핵물리학으로 연구영역을 넓힙니다. 1934년에는 ‘물방울’에 비유한 원자핵 모형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1936년 제시한 원자핵 이론은 그 뒤 10여 년 동안 핵물리학자들에게 일반적인 지침이 되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은 덴마크를 침공합니다. 이어 유태인이던 보어도 곧 투옥될 것이란 소문이 확실해지자 가족과 함께 덴마크를 탈출해 스웨덴으로 갔습니다.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원자폭탄을 제작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몇 개월 뒤 보어는 영국 연구팀과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연구하고 있던 로스 앨라 모스에 합류했고, 암호명 ‘닉 아저씨’로 활약했습니다.



1944년 보어는 영국 처칠 수상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원자력의 국제 관리를 제안했습니다. 이어 소련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핵무기 경쟁을 미리 막자고 설득했습니다. 하지 만두 지도자는 보어의 제안을 거절했고 미국과 소련은 더 무서운 전쟁무기의 개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그 뒤 보어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폭탄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 국제연합(UN)에 공개장을 보냈습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1957년 제1회 원자력 평화 상을 수상했습니다. 만년에도 그는 분자생물학 등 새로운 학문에 관심의 폭을 넓혔으나 1962년 77살의 나이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참고문헌


《청소년을 위한 서양과학사》, 2004, 손영운 지음, 두리미디어 펴냄, 288~295p.

http://www.kps.or.kr/141018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199903N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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