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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Sep 28. 2018

원자의 핵분열에서 에너지찾은 핵물리학자‘엔리코 페르미’


엔리코 페르미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원자의 핵분열에서 에너지 찾은 핵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1905년 아인슈타인은 ‘E=mc²’이란 물리법칙을 〈물리학 연보〉에 발표했습니다. 원자력이란 중성자에 부딪힌 원자핵이 분열되거나 융합될 때 나오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그 에너지가 바로 E=mc²입니다. 에너지(E)는 질량(m) 곱하기 빛의 속도(c)의 제곱입니다. 아주 작은 질량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엄청난 크기의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공식은 원자핵 반응에서 나타나는 질량결손(줄어듦) 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를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1901~1954년)였습니다.






유령 같은 입자란 뜻의 뉴트리노


코발트-60이 베타 붕괴를 통해 들뜬 상태의 니켈-60으로 붕괴한다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어릴 때부터 과학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던 페르미는 어릴때부터 라틴어로 된 900쪽 분량의 수리, 물리책을 밤 새워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14살 때는 고서적 상점에서 구입한 1840년에 출판된 라틴어 물리학서적에 빠져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이를본 아버지의 친구는 그 뒤 페르미의 수준에 맞는 물리학 책을단계별로 선물해 주었습니다.   



17살에 고등사범실업학교에 진학한 페르미는, 이 학교와 제휴하고 있던 피사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이때 그는 편미분 방정식이나 푸리에 분석같은 고급수학 기법을 적용해 문제를 풀었고, 채점관들은 그가 천재라는 것을 확신하고 특별장학금을 수여해 대학 전 과정을 경제적 부담없이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1922년 그는21살의 나이에피사대학교에서 X-선에 관한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26살에 그는 로마대학교의 첫 이론물리학 교수로임명됩니다. 페르미는 이곳에서핵물리학의 새로운이정표를 세웁니다. 당시 물리학의 가장어려운 과제는베타(β) 붕괴였습니다.   



베타 붕괴란, 불안정한 원자핵이 전자또는 양성자를 방출하고 다른 종류의 원자핵으로 변환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는 물리학의 2가지 기본가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운동량 보존의법칙에 맞지 않았습니다. 1930년 볼프강파울리는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예언했는데, 페르미는 이 유령같은 입자를 이탈리어로 작은 중성 입자란뜻에서 ‘뉴트리노(중성미자)라 이름 붙였습니다.   



페르미는 뉴트리노가 새로운 입자가 아니라 새로운 기초상수로 나타날수 있는 힘인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베타 붕괴에 대한 논문〈Tentative theory of Beta ray〉를 완성해 과학저널 《네이처》에 투고했지만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라며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약한 상호작용이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과 더불어 실재를 규명하는 중요한 힘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약한 상호작용 이론은 핵의 연쇄반응속도를 조절하는 문을 열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때마침 받은 노벨상아내와 아이들을 구했다


엔리코 페르미(오른쪽)와 그의 아내 라우라 카폰. 1954ⓒ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1934년 페르미는 본격적으로 중성자에 관한 연구를시작합니다. 그는 충돌하는 입자로 중성자를 생각했습니다. 중성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비행중 에너지를 잃지않아 충격용 입자로 제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독창적인 실험을 설계합니다. 바로 라듐 가스와 베릴륨 가루를 가득 채운 시험관을 가장 가벼운 수소에서 가장 무거운 우라늄까지 중성자로 하나씩 충격을 가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그들이 일하는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핵은 느리고 낮은 에너지의 중성자는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발견은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모든 물질에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해방시킬 열쇠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업적으로 페르미는 1938년 노벨물리학 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대학교에서 왕성한 연구를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 정세는 무솔리니 파시스트의 독재정권 통치에 놓여있었습니다.1938년 7월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추방정책이 이탈리아에도 적용돼 유대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라사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아내 라우라 카폰과도아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미국 망명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페르미는 은밀하게 해외 망명을 고심하던 중 미국 4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6개월 동안의 여행을 정부에 신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노벨상 통지서를 받게 됩니다. 이 통지서는 그가 미국의 비자를 받아 이탈리아를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12월 10일 스톡홀름의 노벨상 시상식에 가족과 함께 참석해 배편으로 1939년 1월 2일 미국으로 떠나는데 성공합니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그러나 수소폭탄 개발은 반대


시카고파일팀 기념사진. 아래줄 맨 왼쪽이 페르미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


오펜하이머와 페르미, 로렌스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



사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핵분열 현상을 실험으로 처음 발견한 사람은 독일 화학자인 오토 한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과학자 리제 마이 트너와 함께 1938년 말 중성자로 충격을 준 우라늄에서 라듐의 변형체가 생기는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라듐 파편을 모으기 위해 접착제로 바륨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륨을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라늄 핵이 쪼개지면서 바륨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마이 트너는 이것을 ‘핵분열’이라고 불렀습니다. 오토 한은 1939년 1월 6일 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월 16일 이 소식을 들은 페르미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첫째,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키면 새로운 방사능 물질이 생긴다는 것. 둘째, 느린 속도로 원자에 충돌시키면 중성자가 원자핵 내부로 들어가 핵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론과 실험으로 이를 증명해 냈습니다. 



페르미가 오토 한 위 실험에서 간파한 것은 핵분열이 일어나면 매우 큰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며, 이때 몇 개의 중성자가 방출돼 다음번 우라늄에 연쇄반응을 일으킬 것이란 점입니다. 바로 핵무기의 원리였습니다. 바야흐로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그 시기에 그는 직감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면 인류에게 큰 재앙이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시카고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연구진을 꾸렸습니다. 마침내 1941년 12월 대학의 스쿼시 경기장 지하에 최초의 원자로 건설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원자로에는 불순물이 없게 특수 제작된 4만 개의 순수 흑연 벽돌 450톤과 45톤의 카드뮴 제어봉이 들어갔습니다. 중성자를 감속시키고 흡수해 핵반응을제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안에 농축우라늄 수 톤을 넣을 구멍 2만 2000개가 뚫렸습니다. 바로 최초의 핵반응으로 ‘시카고 파일-1’이었습니다. 



1942년 12월 2일 1년여의 공사 끝에 세계최초로 원자로의 연쇄 핵분열반응 실험이 실시됐습니다. 28분 동안 2분의 1 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인류가 원자핵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페르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지만 수소폭탄 개발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1945년 위암 진단을 받고 같은 해 11월 29일 숨을 거뒀습니다.



과학자들은 그를 기념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원자번호 100번의 새로운 원소를 페르뮴이라 명명했고, 원자핵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를 페르미라 불렀습니다. 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에너지 개발과 생산에 업적을 이룬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엔리코 페르미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전기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청소년을 위한 서양과학사》, 2004, 손영운 지음, 두리미디어 펴냄, 310~315p.

https://news.joins.com/article/675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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