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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Dec 11. 2018

다윈을 만든 사람들

다윈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혁명적인 과학이론을 만들었을까요?






다윈을 만든 사람들


젊은 시절의 찰스 다윈.(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1859년 11월 24일은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간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날입니다."





1859년 11월 24일은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간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날입니다. 다윈은 1831년 12월부터 영국의 해군 측량선인 ‘비글호’를 타고 1836년 10월까지 남아메리카, 태평양, 인도양, 남아프리카를 항해하면서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여 책으로 출간한 것이지요. 『종의 기원』의 출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만큼이나 세상을 변화시킨 과학 혁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윈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혁명적인 과학이론을 만들었을까요? 








의사 집안의 금수저 탄생



다윈의 친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다윈이 진화론을 확립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출생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1731~1802)은 의사이자 시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박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뷔퐁(1707~1788)의 생물 진화 사상을 계승하여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주노미아』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다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아들 중 하나가 찰스 다윈의 아버지인 로버트 다윈이고, 딸 비올레타는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의 어머니입니다. 골턴은 지리학, 기상학, 인류학 등을 연구했으며, 우생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찰스 다윈의 외사촌 동생인 골턴 역시 진화론 연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윈의 외할아버지인 조사이어 웨지우드(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다윈의 아버지인 로버트 다윈(1766~1848)은 역시 의사로서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부유한 다윈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아버지인 이래즈머스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었고, 아들인 찰스 다윈도 의사가 되기를 바라며 의학 공부를 시킨 것이 이런 집안의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로버트 다윈의 아내는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 출신의 수재너 웨지우드입니다. 수재너의 아버지인 조사이어 웨지우드(1730~1795)는 영국의 도예가이자 기업자로 도자기 제조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영국 왕실의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현재도  웨지우드라는 브랜드로 도자기가 제조되고 있습니다. 다윈 일가가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은 웨지우드와 같은 상류층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집안을 배경으로 태어난 찰스 다윈에게 친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학문적인 지주, 외할아버지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혁명적인 사고의 지주가 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윈 가문이 생명과 자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다윈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아버지인 로버트 다윈(1682~1754)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증조할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변호사 출신인데 고향인 영국의 엘스턴에서 쥐라기 시기의 수장룡인 플레시오사우루스의 화석을 발견하여 왕립학회에 기증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왕립학회 회장이 그 유명한 아이작 뉴턴(1642~1727)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증조할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뉴턴을 만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아들들이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막내아들이 바로 이래즈머스 다윈이었던 것입니다. 


곤충채집을 좋아했던 7살의 찰스 다윈.(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의사가 될까, 생물학자가 될까?



1809년 2월 12일, 영국의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난 찰스 다윈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 수재너가 다윈이 7살 때 사망하면서 다윈은 형과 누나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다윈도 나중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어머니의 이른 사망으로 다윈이 방황할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고집이 셌지만 인자한 아버지였던 로버트 다윈은 아들을 위해 슈루즈베리의 집 뒤에 있는 개천과 숲을 산책하면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곤충채집을 좋아했던 7살의 찰스 다윈.(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다윈은 슈루즈베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당시 교육 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한 학생 중 하나였습니다. 권위적이고도 암기 위주의 교육은 다윈에게 곤욕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다윈은 집 뒤의 산책로에서 생물을 관찰하거나 채집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신기한 딱정벌레를 채집하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또한 집안에 작은 실험실이 있어서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할아버지의 이름과 같음)과 함께 화학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험실 옆에는 온실도 딸려 있었는데 아버지의 취미로 식물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다윈은 이런 환경에서 식물, 동물, 과학 실험 등을 통해 박물학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딱정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잡다가 손 안에 가득하면 입에 넣고 다른 딱정벌레를 잡기도 했습니다. 딱딱한 딱정벌레를 입에 넣을 정도로 곤충채집을 좋아했다고 하니 다윈의 박물학 정신은 이 때부터 생긴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다윈을 보며 아버지는 형과 함께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애딘버러로 보냈습니다. 1825년 애딘버러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해서 2년 정도 의학 공부를 했지만 1827년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해부학 수업은 다윈에게 의학 공부를 포기하는 데 한 몫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해부학 수업을 했는데 시체의 훼손이나 부족한 시체로 인해 수업 환경이 열악했고, 이런 것들이 다윈에게 수술에 대한 혐오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마취학이 발달하지 않아 고통을 받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윈은 의사의 길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애딘버러를 자퇴한 다윈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캠브리지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1831년 신학과를 졸업했지만, 다윈은 신학보다 박물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습니다. 육촌 형인 윌리엄 다윈 폭스와 곤충채집을 하거나 영국의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존 스티븐 헨슬로(1796~1861)의 식물학 강의를 놓치지 않고 들었습니다. 헨슬로는 현대 지질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애덤 세지윅(1785~1873)에게 다윈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다윈은 폭스, 헨슬로, 세지윅에게 박물학, 식물학, 곤충학, 광물학, 지질학 등의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고, 1831년 비글호를 타게 되는 데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비글호 승선을 추천한 것도 애덤 세지윅이었습니다.





진화론은 다윈 이전에도 있었다!


종의 기원. (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친할아버지의 진화 연구에서 영향을 받았듯이 진화론은 다윈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목적에 맞게 창조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목적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식물이나 동물의 종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동식물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1744~1829)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라마르크는 식물이나 동물이 주위 환경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린이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나뭇잎을 먹기 위해 목을 길게 늘이는 오랜 세월을 통해 결국 기린의 목이 길게 변화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위 환경에 맞추다 보니 몸의 모습이 점점 복잡하게 진보한다는 것이지요. 환경에 맞게 변화한 표현 형질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생각은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진화에 대한 생각은 이래즈머스 다윈에게 영향을 미쳤고, 결국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러 환경에 적응한 종만이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설’로 정립된 것입니다.


외사촌이자 다윈의 부인인 엠마 웨지우드. 다윈의 평생 연구 파트너였다.(위키백과)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다윈 이전부터 있었던 진화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비글호 항해를 통해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종의 기원』의 출간과 진화론의 정립에는 다윈에게 영향을 미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다윈의 아내 엠마 웨지우드입니다. 웨지우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엠마는 외할아버지 조사이어 웨지우드의 친손녀로 다윈과는 외사촌이기도 합니다. 엠마는 연구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고 조언을 한 훌륭한 조수였으며, 평생의 연구 파트너였습니다.











참고 자료


위키백과,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이래즈머스 다윈/ 웨지우드/

나무위키, 찰스 다윈

『신과 다윈의 시대』,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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