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물리학의 현대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론물리학자 이휘소박사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인 1935년 1월 1일 부부 의사인 이봉춘, 박순희 씨 사이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바로 소립자물리학의 현대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론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년) 박사입니다.
그는 교통사고로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 기간의 업적만으로도 여전히 물리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젊은이는 드물 정도입니다. 1990년대 그를 소재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에서 그리는 것처럼 과연 이휘소 박사는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가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요?
1989년 발간된 공석하의 소설 《핵물리학자 이휘소》와 1993년 출판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차례 이휘소 박사에게 핵무기 개발을 도와달라는 친서를 보낸 것으로 소개됐습니다.또 이휘소 박사는 1977년 5월 일본에 들렸을 때 자신의 다리뼈 속에 마이크로필름을 숨겨와 우리 정부에 전달했고, 이에 미국 정부가 사고를 위장해 이휘소 박사를 살해한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고려대 물리학과 강주상 명예교수는“이휘소 박사님이 국내 핵개발에 관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합니다.실제로 공석하 씨는 언론을 통해 “박 대통령의 친서나 마이크로필름은 당시 정황을 추측해 픽션으로 만들어 본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핵무기에 개발에 대한 이론은 1970년대 미국 대학생의 졸업논문에 핵폭탄 설계도가 실릴 정도로 공개된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면 원료가 되는 ‘농축우라늄’확보가 중요한데 이는 이휘소 박사의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페르미연구소가 원폭제조의 공로자 엔리코 페르미를 기념해 설립됐으므로 이곳에 몸담고 있던 이휘소 박사가 원폭제조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미 원폭 제조방법은 공개됐고, 관건은 원폭의 재료인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등이었습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위해 플루토늄 재처리와 관련 있는 핵공학과 화학공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모으는데 관심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강주상 교수도 “당시 페르미연구소는 출입이 자유로워 국가 기밀에 관한 연구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며 “이 박사의 연구과제는 이론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고 회고했습니다.
1993년 이휘소 박사의 부인 마리안 리가 소설가들을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대한민국 법원에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소설의 내용이 허위사실인 것은 인정하지만 덕분에 고인이 유명해 졌기 때문에 저작권, 인격권, 프라이버시 등이 침해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습니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관련됐다는 음모론은 혹시 그에 대한 학문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실제로 이휘소 박사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연구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크게 2가지로 꼽힙니다.
첫 번째 업적은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입니다. 전자기력과 약력(弱力)의 통합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1967년 미국인 스티븐 와인버그가 처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약(電弱)이론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중성류(neutral current)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약작용을 전달하는 W입자의 질량이 양성자의 100배 정도로 재규격(renomalization)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계산이 불가능한 이론인지 아닌지가 불확실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이르러 중성류가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1970년 여름 코르시카 섬에서 열린 하계 입자물리학교에서 이휘소 박사의 발표 내용을 듣던 네덜란드의 대학원생 헤라르뒤스 토프트가 영감을 얻어 와인버그의 이론을 재규격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다만 토프트의 방법은 계산과정이 너무 복잡해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휘소 박사가 1972년 발표한 논문 ‘재규격화가 가능한 질량이 있는 벡터 중간자이론-힉스현상의 섭동 이론’에 의해 이 문제는 명쾌하게 계산되고 증명됐습니다. 이 공로로 토프트와 그의 지도교수 마르티뉘스 펠트는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습니다.
두 번째 업적은 ‘참’(Charm)입자의 탐색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머리 겔만 교수는 모든 물질과 소립자는 u(업)쿼크, d(다운)쿼크, 전자라는 기본 입자로 구성돼 있다는 ‘쿼크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그 뒤 하버드대 셀던 리 글래쇼 교수가 두 가지 쿼크 이외에 c쿼크라는 새로운 쿼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잘 알려져 있던 두 입자(Kl과 Ks)의 질량차로부터 c쿼크의 질량을 계산해냈습니다.
이어 c쿼크와 그 반입자로 구성된 참입자가 실제로 발견됐습니다. 참입자를 구성하는 c쿼크의 질량은 이휘소 박사가 계산했던 것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1979년 와인버그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파키스탄인 압두스 살람은 “이휘소 박사의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c쿼크의 질량 추정이 없었다면 참입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리 빠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같은 업적 때문에 제자인 강주상 교수는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노벨상은 최대 3명까지, 2개 분야 이내에서 시상하는 제한조건이 있고 한번 수상한 주제는 다시 시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 조건으로 볼 때 이휘소 박사는 참입자 분야보다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로 노벨상을 탔을 가능성이 컸다고 합니다.
비록 이휘소 박사 자신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 결과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많은 과학자들이 노벨상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참입자의 발견으로 1976년 버튼 리히터와 새뮤얼 팅이 수상했고, 1979년 와인버그와 살람이 표준모형으로, 1999년 토프트와 벨트만이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로 받았습니다. 나아가 2004년에는 그로스, 윌첵, 폴리처가 점근 자유이론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비록 이휘소 박사의 노벨상 수상 기회는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가 활약하던 시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내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이론연구 및 실험을 위한 인프라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과학자 가운데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날이 곧 오리라 기대해 봅니다.
참고문헌
강주상, 2006, 《이휘소 평전》, 럭스미디어
《과학동아》, 1991년 6월호,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100-105pp.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9365&cid=60335&categoryId=60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