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가을 미국 브랜다이스대학의 사회학과 모리 슈워츠 교수는 사회심리학 수업을 위해 강의실에 들어섭니다. 20년 넘게 강의를 해온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 강의를 들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해야겠습니다”라며 “이번 학기 강의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걱정된다면, 교과목을 변경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소 모리 교수는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춤을 좋아해 매주 수요일 밤,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교회에서 열리는 무료 댄스 파티에 가곤 했습니다. 탱고 음악 테이프를 들려달라고 요청한 뒤 무대를 독차지하며 정열적인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그는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걷기가 힘들어졌고, 비틀거렸으며, 어느 날에는 극장 계단에서 쓰러졌습니다.
한동안 여러 의사들을 만났습니다. 혈액을 검사했고, 소변을 검사하기도 했습니다. 기구를 등 뒤에 꽂고 내장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사가 근육 생체조직 절편 검사를 통해 신경 계통에 문제가 있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추가로 그는 신경반응 조직검사를 받은 뒤, 신경외과 진료실에서 의사로부터 “루게릭병이라고 알려진 ‘근위축성 측상경화증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에 걸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루게릭병은 촛불과도 같다. 그 병은 신경을 녹여 몸에 밀랍 같은 것이 쌓이게 한다. 이 병은 다리에서 시작되어 차츰차츰 위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허벅지 근육이 제어력을 잃게 되면 자기 힘으로만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더 심해져 몸통 근육이 제어력을 잃게 되면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게 된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환자는 목에 구멍을 뚫고 튜브로 호흡해야 한다.”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중에서
루게릭병이란 이름은 193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를 대표하는 강타자 루 게릭(Lou Gehrig)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1932년 아메리칸리그 선수로는 처음으로 한 경기에서 홈런 4개를 쳤으며, 2년 뒤 아메리칸리그의 타율과 홈런, 타점 부분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당대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그는 2,130경기에 연속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통산 2위에 해당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하지만 루 게릭은 병에 걸리고 3년만인 1941년 38살의 나이로 사망해 많은 미국인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뒤 그가 걸린 병을 그의 이름을 따서 루게릭병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공식 병명인 ‘근위축성 측상경화증’은 근육이 사라지고 척수에 있는 운동신경 다발이 딱딱하게 굳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의 골격근은 신경계의 지배를 받는데, 특히 운동신경세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운동신경세포는 대뇌피질에 있는 상위 운동신경세포와 척수와 연수에서 시작되는 하위 운동신경세포로 나뉩니다. 상위 운동신경세포는 축삭이라고 하는 긴 신경돌기를 통해 하위 운동신경세포로 신호를 보내면, 하위 운동신경세포도 축삭을 통해 근육에 전기신호를 전달합니다. 루게릭병은 이들 상위와 하위 운동신경세포가 선택적으로 사멸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입니다.
루게릭병에 걸리면 운동기능과 관계된 모든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증상 초기에는 사지가 가늘어지고, 힘이 없어지거나 혀와 입술, 구개 등의 발음기관이 잘 움직이지 않아 발음이 어눌해지며, 음식물이 입에서부터 위로 통과하는데 장애를 받는 느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어 점차 증상이 심해지면 두 발로 서 있거나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게 됩니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게 되고, 결국 호흡 근육이 마비되면 죽음에 이릅니다.
일반적으로 한쪽 팔이나 다리에서 먼저 마비 등의 증세가 나타납니다. 처음 증세가 나타난 후 2~5년간 온몸에 증세가 퍼집니다. 루게릭병의 발생률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해마다 500~1,000명이 새로운 루게릭병으로 진단을 받습니다. 가족력이 있는 경우 47~52세에 주로 발병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58~63세가 가장 흔합니다. 80세가 넘어가면 발병률은 급격히 줄어들지만, 간혹 20~30대 젊은 층에서 발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루게릭병의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손발을 움직이려면 뇌에서 전기신호가 발산되어 신경을 통해 근육까지 전해져야 하는데, 이 신호를 전달하는 글루타민산의 양이 많으면 역으로 그 신경을 파괴할 수 있다는 ‘글루타민 과잉설’이 있습니다. 또 신경을 성장시키거나 상처 난 세포를 회복하는데 필요한 영양성분이 결핍되면 운동뉴런이 파괴된다는 ‘신경영양인자 결핍설’이 있고, 소수의 환자가 부모와 같이 루게릭병이 걸리는 사례가 있어 ‘유전성설’이 있습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유전적 원인은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양인 환자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유전자(C9orf72)가 동양인 환자에게선 적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 환자에게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루게릭병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완치약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1990년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첫 치료제인 릴루졸이 개발됐습니다. 2014년에는 한양대병원 난치성세포치료센터와 코아스템이 공동 개발한 자가골수 유래 줄기세포치료제(뉴로나탈-알)를 내놓았습니다. 2015년에는 일본 미쓰비시 다나베가 뇌경색 치료제로 개발한 에다라본을 루게릭병 치료제로 다시 승인받았습니다.
이들 약제는 환자의 호흡근이 마비되기까지의 기간을 몇 개월 연장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지난해 말 호주 퍼스에서 열린 제30회 루게릭병/운동신경원병 국제 학술대회에서는 미국 줄기세포전문기업 브레인스톰 세러퓨틱의 치료제 ‘뉴로운’의 2상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돼 환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했습니다. 누워만 있던 루게릭병 환자가 뉴로운 임상시험 후 병상에서 일어나는 동영상이 공개된 것입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완치약의 소식이 전달되길 기대해 봅니다.
<참고문헌>
신제영, 잉광우, 2015,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의 진단과 치료, 대한의사협회지, 58(2) pp.131-138.
홍윤호, 2009,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루게릭병을 잡아라, 10월호
권대익, 2019, 가장 잔인한 병, 루게릭 … “혈액으로 병 진행 예측 가능”, 한국일보, 12월 17일자
한국루게릭병(ALS)협회 홈페이지(http://www.kalsa.org/sub3/index2.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