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에서 원주와 지름의 비인 원주율 파이(π)는 3.1415926…으로 소수점 아래 소수가 무한히 계속되는 무리수입니다. 해마다 원주율을 기념하기 위해 3월 14일 1시 59분이면 ‘파이데이’(π day) 행사가 열리곤 합니다. 그런데 ‘파이 근삿값의 날’이 별도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π값을 소수 둘째 자리까지 표시해 3.14로 사용하지만 해외에서는 π를 22/7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7월 22일을 파이 근삿값의 날로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π는 지름에 대한 원둘레의 비인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이 기호는 웨일즈 수학자 윌리엄 존스가 《수학의 새로운 입문서》라는 책에서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의미하는 ‘periphery’의 약자인 π를 처음 제안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사용하면서 표준화됐습니다.
원의 면적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뿐 아니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알아야 할 값이었습니다. 도대체 π는 정확히 얼마일까요? 수많은 사람이 π의 정확한 값을 밝혀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친 신비의 수였습니다. 또 π 값을 얼마나 정확히 아는가는 그 사회의 문명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기록이 발견되는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들도 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이 남긴 아메스 파피루스에는 ‘지름이 9인 원과 한 변의 길이가 8인 정사각형의 넓이가 같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이집트인들이 π×(9/2)²=8²로부터 3.16049라는 π의 근삿값을 추정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점토판에 정육각형과 외접원의 둘레의 비에 대한 값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들이 3×(1/8)=25/8≒3.125라는 원주율의 근삿값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구약성경 ‘열왕기’에도 부정확한 3을 π값으로 사용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π값을 3.1416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서기 380년에 출간된 천문학 서적에 남아있고, 인도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π=√(10)=3.162277…을 사용했습니다.
경험적 추측으로 π의 근삿값을 추정하던 인류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러 처음으로 과학적인 계산법을 도입합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외접육각형과 내접육각형에서 출발해 변의 수를 두 배로 늘려가는 방식으로 정96각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에 내접하는 96각형과 외접하는 96각형으로부터 원 둘레의 상한과 하한을 얻어냈습니다.
이 결과, 아르키메데스는 π값의 범위를 223/71과 22/7 사이에 있음을 유도했습니다. 그가 찾아낸 원주율의 근삿값은 3.141635였습니다. 기원전 240년경 아르키메데스로부터 시작된 이 방법은 17세기 초 독일의 수학자 루돌프 판 코일렌이 (2의 62제곱)각형을 이용해 소수 35자리까지의 원주율의 근삿값을 구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한편 130년 중국의 《후한서》에는 π값을 3.1622로 사용했고, 263년 유휘는 원에 내접하는 6각형에서 내접하는 192각형을 활용해 157/50=3.14를 산출했습니다. 이어 3072각형으로부터 π값을 3.14159라는 좀 더 정확한 근삿값을 도출해냈습니다. 5세기 조충지와 그의 아들 조항지도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을 사용해 약률 22/7과 밀률 355/113≒3.141592을 산출했습니다.
그런데 원주율의 역사에서 주목할 점은 원주율의 근삿값이 더 정밀하다고 하여 더 유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가 더 작은 분모를 가지면서도 좀 더 좋은 근삿값인 355/113를 사용하지 않고, 377/120을 사용한 것은, 이 값이 60진법으로 나타내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십진법을 사용한 많은 문명권에서 22/7 대신 157/50≒3.14를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원주율을 계산하는 새로운 관점은 아르키메데스 이후 약 2000년이 지나서야 가능했습니다. 1592년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는 반지름이 1인 정다각형의 넓이의 역수와 원 넓이의 역수의 관계로부터 무한곱으로 표현되는 비에트 공식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π에 대한 최초의 해석적 식으로 원주율 계산의 역사에서 대수적 접근이 시작된 계기가 됐습니다.
1905년 미국의 과학사가이자 과학교육자 플로리앙 카조리는 “π의 긴 소수 자리수는 이론적으로나 실용적 차원에서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π의 정밀한 근삿값보다 더 중요한 수학적 발견은 π가 유리수가 아니라는 요한 램버트의 증명과 π가 대수적인 수가 아니라는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증명이다”고 합니다.
1647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오트레드는 1647년 원주율을 δ/π로 나타내면서 원주율을 뜻하는 기호 π가 사용됐습니다. 1706년 윌리엄 존스가 처음으로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를 π로 나타냈고, 1737년 오일러가 그의 저서에서 π를 기호로 채택한 이래, π는 원주율을 뜻하는 공식 기호가 됐습니다. 모든 원에서 원주율이 일정함을 밝힌 것은 아르키메데스였지만, 그 상수를 π로 표현한 것은 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르키메데스 시대에 π는 숫자 80을 나타내는 그리스 문자였습니다.
20세기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π는 시뮬레이션으로 근삿값 추정이 가능해졌습니다. 1949년 에니악 컴퓨터가 70시간에 걸쳐 소수 2035자리까지 계산한 것을 시작으로 2020년 1월 29일에는 티모시 밀리컨이 슈퍼컴퓨터로 계산한 50조 자리까지 계산됐습니다. 계산 기간은 총 303일이 걸렸는데, 이는 1초당 약 191만 자리의 원주율을 계산해내는 속도였습니다. 지금도 컴퓨터를 이용한 원주율 계산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 김인수, 1998, 작도할 수 없는 초월수 π의 비밀, 과학동아 6월호, pp.164-167.
· 박경미, 2006, 박경미의 수학콘서트, 동아시아, pp.236-238.
· 김병준, 2015, 외계인도 아는 원주율(π), 과학동아 10월호, pp.104-107.
· 강향임, 최은아, 2015, 초등학교 영재교육 대상자의 원주율 개념에 대한 이해, 대한수학교육학회지 수학교육논문집, 29(1), pp.91-110.
· 최은아, 2017, 원주율에 대한 심화학습을 위한 조선산학의 활용 연구, 대한수학교육학회지 수학교육학연구, 27(4), pp.81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