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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과학 Apr 10. 2018

우장춘 탄생 120주년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40대의 우장춘 박사. 일본에서 찍힌 사진. ⒸPublic Domain(Wikipedia commons)


“불우와 고민 속에 진리를 뽑아내어 종자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자던 학문의 바다 물결 한번 치리라. 온갖 채소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도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표창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니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하리라.”


이 시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년)의 묘비에 새겨진 글입니다. 그의 인생은 암울했던 한국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됐습니다.아버지 우범선은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궁궐의 문을 열어준 가담자였습니다.이 때문에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해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우장춘입니다. 과연 그는 불우와 고민 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짓밟혀도 꽃을 피우는 민들레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태어났습니다.다섯 살 되던 해인 1903년 11월 자객에 의해 아버지가 피살당합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을 혼자 키워야 하는 했던 어머니는 남편의 조국도 자신의 조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남편의 나라에 봉사할 수 있게 훌륭하게 키우려고 아낌없는 노력을 쏟았다고 전해집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이 꿋꿋하게 자라도록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우장춘이 일본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고 길거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를 가리키며,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우고야마는 들꽃처럼 굳센 사람이 되어라”고 다독였습니다.우장춘은 평생 그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


1919년 3월 우장춘은 동경제국대학 부설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연구대상은 나팔꽃이었습니다. 나팔꽃은 돌연변이가 많아 유전학을 공부한 그에게 좋은 연구재료였습니다. 우장춘은 나팔꽃에서 돌연변이가 나타나는 이유와 실제 자손들의 표현형을 살피고, 식물의 품종개량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했습니다. 본격적인 육종학자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1924년 어머니의 소개로 고하루(小春)라는 일본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고하루의 부모가 우장춘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하자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고등학교 교사였던 스나가 고헤이의 양자가 됩니다.이때부터 우장춘은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란 이름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장춘은 연구 논문을 발표할 때 ‘스나가’라는 성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본어 논문에는 우장춘(禹長春)으로, 영어 논문에는 Nagaharu U.로 표기했습니다.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완전히 일본인으로 살아간 남동생과는 대조를 이룬 삶이었습니다. 그만큼 우장춘에게는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애착이 컸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우장춘 삼각형


1926년 사이마타현의 고노스 시험장으로 근무지를 옮긴 우장춘은 나팔꽃의 돌연변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30년 가을 혼신의 노력 끝에 우장춘은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전기누전으로 고노스 시험장에 불이 납니다. 이 불길은 그의 논문이 있던 농장의 본관 건물을 완전히 삼켜버립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장춘은 다시 유채 종자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수확 기간이 짧은 일본 종자와 수확량이 많은 서양 종자의 장점만을 모아 새로운 잡종 종자 ‘농림1호’를 만들어냅니다.그는 서양 종자와 재래종 종자의 씨앗을 교배하여 새로운 식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혀냈습니다.바로 ‘종의 합성이론’입니다.


1936년 우장춘은 세계 육종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배추 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란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같은 속에 속한 다른 두 종끼리 교배하면 같은 속에 속한 또 다른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식물을 교잡해 만든 새로운 식물을 ‘우장춘 삼각형’이라고 부릅니다.예를 들어 배추와 양배추 등 기본 종(배추속)을 교배하면 유채와 같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배추(염색체수=10)와 양배추(염색체수=9)의 합성으로 이미 존재하는 유체(염색체수=19)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그 과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by Adenosine(English Wikipedia) CC BY-SA 2.5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 우장춘은 십자화과 배추속에 속하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얻은 식물체가 유채와 같음을 증명하고 이 현상을 종의 합성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이어 배추속 식물 6종의 연관성이 밝혀졌는데 이를 도식화한 것이 우장춘의 삼각형입니다원 안은 염색체로 녹색은 배추(n=10), 파란색은 양배추(n=9), 빨간색은 흑겨자(n=8)의 염색체이며 n은 염색체 수입니다이들 사이에서 에디오피아 겨자(n=17), (n=18), 유채(n=19)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절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면서 쌀과 보리 생산에만 관심을 둘뿐 무와 배추 같은 채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이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해마다 3,000석 이상 일본산 채소 종자가 수입되고 있었습니다. 광복은 맞이했지만 식량은 부족했고,종자와 비료, 농약 등이 없어 농민의 피해는 컸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을 모시기 위한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운동’이 시작됐습니다. 그의 나이는 52세이던 1950년, 한반도 정세는 불안했고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하지만 평소 인생의 절반은 어머니의 나라에서,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고자 했던 우장춘의 고집은 꺾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1950년 3월 8일 그는 단신으로 귀국합니다.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수확량이 턱없이 부족하던 국내 씨감자를 병에 강한 무병 씨감자로 만들었고, 시험농지와 채종포를 강원도 대관령에 설치했습니다.이때 재배된 감자는6․25전쟁 이후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우장춘은 제주도의 기후와 풍토에 알맞은 감귤 재배를 적극 권장하고 품종을 개량하여 국내 최고의 감귤 생산지로 만들었습니다.

연구하는 우장춘 박사의 모습 / 이미지출처 : 농촌진흥청 보도자료


나아가 그는 고추, 오이,양배추, 양파,토마토, 수박,참외 등 20여 품종의 우량 종자를 확보하여 한국 경제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최초의 분야가 채소였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비교적 싼 가격에 풍성한 채소들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우장춘의 공로입니다


1959년 5월 원예시험장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친 그는 병원에 직행해야 했습니다.평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십이지장 궤양에 걸린 것입니다. 3차례 수술에도 그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나날이 그의 병이 악화되자 8월 7일 농림부장이 직접 찾아와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고 우장춘의 목에 기념메달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3일 뒤 그는 아내 고하루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장춘 박사의 문화포장증 / 이미지출처 : 농촌진흥청 보도자료





<참고문헌>

박성래, 신동원,오동훈, 2001, 《우리과학 100년》,현암사

http://scent.ndsl.kr/site/main/archive/article/우장춘-과연-씨-없는-수박-최초-개발자

http://www.dongnae.go.kr/tour/index.dongnae?menuCd=DOM_000000402003003000#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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