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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바깥 Dec 07. 2016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화 <누에치던 방>을 보고

'타인'이 아닌 '사람'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타인'이 아닌 '사람'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낯선 이를 위해 어깨를 내어주는 '관계'는 가능할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화 <누에치던 방 Jamsil>을 봤습니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주최 측은 "창의적인 구성으로, 시대적인 고찰을 담고, 개인 간의 연대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엿보았다"라고 하네요.
 [수상자인터뷰] https://www.facebook.com/busanfilmfest/videos/1092590470790496/


이완민 감독님. 출처 | 펀딩21, 누에치던방 제작팀


[감독]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작품입니다. 이전 영화 <가재들이 죽는>에서와 같이 이번에도 은유적인 제목이 쓰였습니다. 해당 작품의 경우 1급수 맑은 물에서만 살 수 있는 가재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은유라고 저는 읽었습니다(이전 작품 <가재들이 죽는> 리뷰, http://indieforum.co.kr/take/?p=116).


 이번 작품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번, 유년을 보내기 위한 한판에 굿 같은 것, 2번 성년기에 만나는 친구랑 유년기에 만나는 친구가 어떻게 다를까 하는 물음, 3번은 제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긴 한데 처음 본 누군가에게 반가움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나 의문이 들었고, 그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이완민 감독 from 관객과의 대화 GV)

인터뷰 영상도 있습니다. 반가움이란 어느 일방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busanfilmfest/videos/1088382344544642/


[제목, 누에치던 방 蠶室 Jamsil]

"누에치던 방을 한자로 쓰면 잠실인데 잠실 지역에서 주로 촬영을 하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 흔한 비유로 누에가 나비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지지고 볶던 한 공간. 그곳을 벗어나는 것. 그 방은 누군가의 마음일 수도 있고 고시원, 집, 부모 등등이 될 수가 있는데 그런 곳들을 총체적으로 연상시키고 싶었던 것 같아요"(이완민 감독 from 관객과의 대화 GV)

 누에는 번데기 시절을 보내기 위해서 고치를 만든다. 순백색의 정교한 고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해진다. 고치는 영화 속에 나오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그 작은 방들(독서실, 인쇄소, 아파트)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시간들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나방의 몫인 것이다. 미희는 그 단단한 고치 속에 꼼짝없이 붙들려 과거의 선배를 불러내서 15년 전 학회를 탈퇴한 사과를 하고, 근경이라는 고교 동창에게 뜬금없이 만나자고 전화를 해댄다. 미희는 철저히 과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나방이었다. 온통 과거가 현재 진행형처럼 바뀌어버린 혼돈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누에치던 방>의 엔딩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고치를 뚫어보지도 못하고 고치 속에 가만히 웅크린 나방처럼 날개도 한 번 펴보지 못 한 채 뽕잎만 갉아먹는 시간을 살았던 것이다.(from 양지영, 2016 BIFF 시민평론단)

누에는 번데기가 되어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뽕잎을 열심히 먹고, 실을 토해 제 몸 바깥 둘레를 겹겹이 둘러싸 자신의 집 누에고치를 만든다. 그리고 아름다운 비단실을 남기고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 우리가 온전한 존재(나방)가 되기 위해선 사람과의 관계 맺음(뽕잎)이 필요하다. 성숙에게는 별안간 찾아 들어온 미희도, 달콤한 키스를 선사한 기자와의 관계 맺음도 필요했을 것이다. 잠실의 빌딩 숲 속에서 끊임없이 소통하려 애쓰는 주인공들의 몸부림이 절절하다.(from하은숙, 2016 BIFF 시민평론단)


영화 촬영의 현장, 출처 | 본인

저는 감독님과의 인연으로 카메오/단역으로 출연하게 됐습니다 ㅎㅎ 시나리오를 읽고, 올해 1월의 어느 하루 동안 촬영 과정에 함께 했는데요, 활자에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말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지닌 생생한 에너지를 느끼고, 집단 협업의 장으로서 영화 제작 환경을 실감했습니다. 영상으로 완성된 작품은 이번 상영에서 처음 확인했는데,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이런 영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음에 기뻤습니다.


[영화 시놉시스] (from BIFF Program Note) 

 채미희(이상희 분)는 조성숙(홍승이 분)의 집을 찾아가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음을 주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처음 본다. 고교시절 단짝 친구가 아니었는데 왜 그렇다고 했는가? 고교시절 단짝 친구가 아니었는데 왜 아니라고 안 했는가? 질문하고 자문하는 사이, 둘은 가까워진다.
  <누에치던 방>은 쉽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영화가 아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옛날 단짝 친구처럼 행동하고, 전혀 모르던 남녀가 과거의 연인처럼 돌변한다. 채미희는 조성숙의 과거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날아온 사람일까?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는 가운데 인물들은 기괴한 방식으로 엮인다. 깔끔한 하나의 해석을 대신해서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한다. 인물들을 연결하는 씨줄과 날줄이 흥미로운 영화.


[등장인물] 

From twitter@DanHwa1117

<연애담>에 출연한 이상희님, <이매진>, <어머니>에 출연한 홍승이님,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줄탁동시>에 함께 출연한 김새벽, 임형국님, <역도요정 김복주>에 출연 중인 이주영님 등 출연진이 화려합니다. 강렬한 인상의 장면과 대사들이 많은데요, 몇 가지만 정리해봤습니다. 영화관에서 직접 마주하고픈 분들은 이 부분을 패스해주세요 ~   

채미희(이상희 분)

“어렸을 때 체육시간에 피구를 할 때 너무 끔찍한 거야. 원 안에서 공을 피해 다니는 것도 너무 공포스럽고 원 밖에서 사람들 맞추는 것도 진짜 너무 싫고. 그래서 가만히 서있었어. 그러면 둘 중에 하나야. 죽거나 아니며 살거나”

"지하철에서 어떤 여고생을 만났거든. 근데 그 여고생 얼굴에... 상처가 하나도 없어 보이더라구... 그게. 아주 오래전 내 모습 같았거든... 그래서 쫓아왔는데..."



조성숙(홍승이 분)

"왜 그렇게 말을 하니, 아프다 얘"


"어차피 사는 게 다 쇼 아닌가? 나는 가끔 그걸 까먹어서 문제야.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를 나누는 걸 자꾸 까먹어."


"다들 어찌나 방어하고 사시는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다들 엄격해가지고. 선생님, 씨, 선배, 복잡해... 다 그냥 서로 반말하고 살면 안 되나? 왜 그렇게 다들 거리를 두려고 그러냐구?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날 첨부터 반말해줘서 너무 좋더라.."



김유영(김새벽 분)


"해치우자, 모든 처음들"


"(익주가 유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르죠. 걔가 좀 욱하는 데가 있었거든요. 정념적인 사람들한테 있는 그런 거. (... 왜요?) 그냥 성격인 거죠. 타고나는 거."





김익주(임형국 분)





"저는, 사람을 증오하게 된 것 같아요. 원래는 그런 사람 아니었는데."











[나의 감상]

이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해가 어렵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운이 짙게 베인 대사들에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우리가 종종 상상했던 순간이 현실화되는 모습을 보며 웃음 짓게 됩니다.

"커피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여기까지 오셨는데"라는 물음에 "밥 먹죠. 밥, 드시죠?"라고 답한다든지, "수고하셨습니다, 담에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라고 말에 "정말 식사할 생각 있으세요? 마음에 없는 말을 왜 하세요"라고 답한다든지, 감정적 기류를 느끼는 상대방에게 느닷없이 "저 결혼 안 했어요. 여자 친구도 없어요. 당신이 첫사랑도 아니고요. 첫 경험도 아니랍니다. 어때요? 하나도 안 부담스럽죠?"라고 얘기한다든지, 굳이 미희와 헤어졌다는 남친이 누구인지를 캐묻고 아직 바뀌지 않은 폰의 배경화면 사진만 보고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평한다든지, 채미희가 "나, 정신병자 같지?"라고 묻자 조성숙이 망설이는 기색 없이 바로 "응"이라고 답한다든지, 함께 술을 마시며 정말 뜬금없이 상대방의 손을 잡는다든지(이 장면을 보면서는 영국의 지하철에서 바로 앞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의 대머리를 쓰다듬고파 그렇게 했다는 한 친구가 떠오르기도).

폐부를 찌르는 대사와 장면들도 많습니다. "삽입했니"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답변, 구걸하는 거지의 뺨을 때리라던 보들레르가 생각나는 장면, 약과를 먹는 장면, 장례식에 영정 대신 자리한 스마트폰 화면 등등...


기본적으로 상상하고 또 해석할 여지가 많은 영화입니다. 여기에는 부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과 이야기를 생략하거나 짧게만 비춰주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는 연출이 자리합니다. 우리는 유영이 죽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그저 맴돌고, 성숙과 유영, 익주의 관계도 흐릿합니다. 미희가 안고 있는 고통, 미희와 근경의 관계 뒤에 놓인 것, 지하철에서 바라는 것 없이 사람들로부터 메모를 받고자 하는 여고생도 친절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각자의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공감을 붙드는 지점이 제각각 자기만의 ‘누에치던 방’과 닿아 있(from 문정임, 2016 BIFF 시민평론단)"음을 마주하게 되는 데 이 영화의 매력이 자리합니다.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과 정서적 교감을 이루려는 그들의 행위는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들이 과거 그리고 현재 모두를 벗어나려는 데 쓰는 재료는 꿈, 광기 그리고 연극이다. 성숙과 미희의 급속한 관계 맺기는 그들이 지닌 상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적 행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미친 척하고 자신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도 서로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런 관계맺기가 현실의 나이테에 다른 변주를 남기려 시도한다. 우리는 때로 가랑비에 젖듯 모르게 변한다. (from Jungwoo Lee, 2016 BIFF 시민평론단


 미희는 여고생에게 프레지아 꽃을 주며 "내가 너의 삶에 증인이 될게"라고 말합니다. 건네준 쪽지에는 <용기를 가지고 살자>라는 말이 적혀있습니다. 이를 위해 영화 속 인물들의  몸부림은 처절합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마주하려 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이기적으로 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고생이나 근경의 태도에서 보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고,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봤던 버전의 시나리오는 미희가 건네준 쪽지가 마지막에 자리했습니다. 올 한 해 많은 만남에 먼저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지난 관계와의 재회도 많았습니다. 여기에는 어쩌면 그 '용기'라는 단어가 제게 줬던 울림과 에너지가 자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면서 조성숙이라는 인물에 가장 감정이입이 됐습니다. 하지만 GV를 듣고, 이후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조성숙이 가장 관념적인 인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쉽게 생각했던 용기가 타인에게는 꽤나 이기적일 수 있음을 놓치진 않았나 자문하게 됐습니다.


 각자가 지닌 자기만의 '누에치던 방'과 닿아있는 지점을 발견함에 따라 한없이 많은 해석이 가능해지는 영화입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의 상영은 끝났지만, 다가올 다음 상영에서의 관람을 추천드리는 이유입니다.    





*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GV에 따르면 감독님이 "음악이 들어가면 반칙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는데요, 그럼에도 4곡이 등장합니다.

 ① 조성숙이 직접 부르는 노래 - 시인과 촌장의 <숲> : 하덕규 3집(1988)

https://www.youtube.com/watch?v=9p3eGMPrmH0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어린 날의 눈물 고인.  


 ② 채미희가 여관을 찾았다가 5만 원이라는 소리에 비싸다며 몸을 뉘이게 위해 찾은 노래방에서 나오는 노래 - 산울림의 <독백>
https://www.youtube.com/watch?v=AZNhQ7GjLO4


③ 지하 술집(사운드 마인드) 씬에서 밴드가 부르는 노래 - 쾅프로그램 서울의 <수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BdepCRFjrl0

④ 가장 중요한 엔딩곡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ㅜ_ㅠ 제보받습니다..



* 제가 직접 찍고 편집한 외의 사진은 영화제작 과정에서의 펀딩 21 프로젝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movie.naver.com/movie/magazine/magazine.nhn?sectionCode=SPECIAL_REPORT&nid=3158&page=1

http://www.funding21.com/project/detail/?pid=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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