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하사탕><히든><살라미나의 병사들><마추카>를 보고
역사적 트라우마·기억의 재현에 관심 있던 2011년 12월, <라틴아메리카 영화와 현대사회(임호준 교수님)>에서 작성한 글. 편의상 브런치에서는 각주를 모두 생략하여 불친절한 글. 심지어 문장이 길다. 한국 영화 <박하사탕(이창동 감독)>, 칠레 영화 <마추카 Machuca(안드레스 우드 감독)>, 스페인 영화 <살라미나의 병사들 Soldados de Salamina(데이비드 트루에바 감독)>, 프랑스 영화 <히든 Caché(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네 작품을 선정하여 분석. 각각의 작품을 ①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서술 ② 트라우마 재현에서 취하는 구조적 특성 ③ 제시하는 탈출구가 지니는 성과와 그 한계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폈기에 특정 작품에 관한 서술만 살필 경우 참고. 마지막 장에서는 해소의 허구와 역사적 트라우마의 재현이 획득할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서술.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참고문헌에 빚졌다. 본래 제목은 "함께 살아감을 추동하는 힘으로써 영화들"이었음.
인간은 시간적․역사적인 축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점은 이 축이라는 게 단선적․일직선적이지 않고 선택적으로 기억이란 형태로 인간에게 남아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 개인 안에서 특정한 시간은 더욱 부풀려져 강하게 새겨져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시간들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기억의 왜곡이 빚어진다. 중요한 것은 전자라 생각하는데, 휘발된 기억은 다시 특정한 계기가 생길 때까지 사라진 채로 삶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지만 강인하게 붙잡고 있는 기억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현듯 수면 위로 출현하여 사람에게 영향 끼치기 때문이다. 잔인하게도 아픈 기억일수록 그 강렬함 또한 더해 이 흔적을 없는 듯 덮는다든지 지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강렬한 기억들은 개인이 행할 수 있는 폭이 극단적으로 축소되는, 역사적․시대적 격변 속에서 깊게 아로새겨지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특히 현대 영화들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그것의 극복을 위해 각 영화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끝으로, 그렇다면 다른 매체도 아닌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현대 영화로 그 범위를 한정한 것은 편의성이나 재현 과정에서 실재와의 지나친 왜곡을 제외하고자 함이기도 하나, 이 틀 안에서 트라우마가 새겨지는 순간으로부터 시간적 거리에 따른 차이들을 엿보기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각각 라틴아메리카의 칠레 작품으로서 <마추카>, 스페인어권 영화로서 <살라미나의 병사들>, 프랑스 영화로서 <히든>, 그리고 한국 영화로서 <박하사탕>의 네 작품을 선정하였다.
<마추카>는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 말기를 배경으로 부자 동네에 사는 곤살로와 불법 판자촌에 사는 마추카 사이에 싹트는 우정과 그 균열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당시 칠레는 세계 최초로 사민주의를 표방한 채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아옌데 하에 여러 가지 새로운 실험들이 행해졌는데, 가난한 이들에게도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주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귀족 사립학교에 들이닥치는 가난한 전학생들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도 이를 배경으로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모두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아옌데 정부 하의 사회 융합, 계급 간 연결에의 노력 시작을 드러낸다. 하지만 기계적인 평등이란 건 세련되지 못하고 상당히 투박한 형태여서 이들 간의 ‘차이’는 한 전학생을 가리키는 학생의 말에서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 쟤 알아요. 쟤네 엄마 우리 집에서 빨래하거든요.” 때문에 이들 간의 융합이 같은 학교에 배정시킨다고 해서 바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온 맥켄로 신부는 이들을 서로 섞이게 자리 배치시키지만, 정작 쉬는 시간이라든지 수영 시간이라든지 모든 시간에 학생들은 서로 끼리끼리 놀 따름이다.
그 차이의 장벽을 가로질러 마추카와 곤살로 사이에 교감이 생기는 것은 때리는 것을 말리는 작은 사건에서부터이다. 약간은 서로에 대한 벽이 낮아진 상황에서 우연히 마추카가 하굣길에 차를 태워줌으로써, 그리고 깃발을 파는 시위 현장으로 나가고 같이 점프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 간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당시 아옌데의 새로운 실험들을 두고 분열된 칠레 사회들을 자연스레 드러내는데,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라디오의 소리라든지 암시장 등지에 덕지덕지 붙은 벽보 등에서 외치는 구호들이 당시의 극심한 분열을 암시한다. 더불어, 두 아이가 깃발을 파는 현장은 아옌데 물러나라 라는 구호가 외쳐지는 현장과 아옌데를 옹호하는 현장 두 가지가 중첩된다. 결국 <마추카>는 계급을 중심으로 극단적으로 분열된 칠레 사회를 배경으로 두 아이 사이의 우정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가늠하고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場)으로서 기능하는 영화인 셈이다.
<박하사탕>은 어느 야유회에 나타난 영호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멀쩡한 양복을 입었으나 행동만큼은 그렇지 못하던 그는 느닷없이 기찻길 철로 위로 올라가,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친다. 어떤 이유로 영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을까? 영화는 이 영호라는 인간의 삶 20년을 순차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중년의 사내, 가구점 사장, 노련한 형사, 심문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투른 신참내기 형사의 끝에 80년 5월 광주의 현장 속에서 순하디 순한 군인의 모습이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80년 5월의 광주의 일은 지금에서야 꽤 많이 알려졌지만 한동안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유신체제에 이은 군부독재에 대해 당시 전국적인 민주항쟁 시위가 있었고, 광주에서는 계엄군과의 충돌이 격화되어 대대적인 학살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군의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물류 수송을 차단하고 언론 통제 등의 흐름 속에 외부와 차단되었던 광주는 심지어 북한 간첩 세력의 소행이라는 딱지까지 받았으나 이후 점차 진실이 알려졌고 당시 많은 젊은 세대들은 이 광주에 대한 부채를 지고 살아갈 정도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격상되어 추모되고 있다. 다시 말해 <박하사탕>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작점이나 결정점으로서 광주의 기억이 단순한 과거를 넘어 현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순임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던 청년 영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압군으로 광주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우발적으로 한 소녀를 사살하게 됨으로써 강력한 트라우마를 지니게 된다. 5․18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진 않지만, 첫사랑에 설레어하고 사진작가의 꿈을 가졌던 순수한 영호가 5․18에 진압군으로 투입되면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의해 인생의 방향을 바뀌게 되고 황폐해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5․18이 단지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추카>가 트라우마가 새겨지는 순간에 대한 영화이고, <박하사탕>이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까지 어떤 영향을 강렬하게 미치는 지를 보여줘 둘 다 트라우마의 원형에 보다 관심을 둔다면, <히든>은 그동안은 잊혔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 환기되는 것을 통해 트라우마 자체보다는 이것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어느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 느닷없이 자신들의 일상이 찍힌 비디오테이프가 배달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처음 비디오 속 단순한 집 앞 풍경은 어느새 누군가 피 흘리는 그림과 함께 배달되기 시작하고 이내 주인공 조르쥬가 나고 자란 고향 집 모습까지 담긴 의문의 비디오가 배달된다. 누가 비디오를 보낸 걸까에서 시작되어 경찰에 신고도 하는 등의 과정에서 조르쥬는 점점 더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어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게 되고, 어느 날 다시 배달된 비디오가 보여주는 길을 따라갔다 어릴 적 그가 집에서 모함으로 내쫓은 마지드를 만나게 된다. 마지드는 알제리인 2세로, 1961년 10월 파리에서 있었던 알제리인에 대한 살인적 진압과 200여 명을 센 강에 수장시키는 대학살의 과정에서 부모님을 잃었다. 이는 그동안은 은폐되다 최근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한 일로, 당시 프랑스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알제리 해방전선에서 인종차별적 통금에 대해 반대하는 차원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어찌 됐건 <히든>에서 어릴 적의 조르쥬는 부모님이 불쌍한 마지드를 양자로 맞아들이려 하자, 질투심에 이를 훼방 놓고자 거짓말을 꾀했고 그를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는 데까지 성공했던 것이다. 어느 날 배달된 의문의 테이프는 수십 년만의 이 둘의 조우를 가능케 한 것이고 조르쥬는 이런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기보단 피하려고만 한다.
나는 이 영화의 기본적 상황 설정이 조르쥬라는 한 개인의 심성적 문제에 국한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조르쥬 부모가 아들의 모함에 쉽게 넘어가 결국 집 밖으로 마지드를 내쫓고 이후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프랑스 사회에 하나의 식민 대상으로 알제리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와 편견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전쟁을 비롯하여 알제리와 관련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프랑스 지식인의 트라우마’와 같은 수사로 표현하는 데서 이들의 자기중심성을 엿볼 수 있다. 때문에 마지드가 어릴 적 삶,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은 일종의 장난스러운 모함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당시의 시대적 배경 하에서 작동된 인종차별적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본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를 쫓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왜 조르쥬는 마지드를 테이프를 보낸 범인으로 생각하는지, 왜 마지드가 범인으로 지목되어야 하는가에 의문부호가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 속 그어진 선들에 의해 자행되는 무차별적 의심과 적대감이 빚는 폭력과 비극은 지식인의 허위성과 맞물려 역겨울 정도로 묘사된다.
<살라미나의 병사들>은 동명의 소설을 영화한 작품으로 앞의 세 작품과 달리 그 트라우마를 겪은 당사자가 아닌, 후대의 관점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들과 가장 구분된다. 1936년부터 39년까지 이어졌던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만이 아니라 세계에 있어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스페인 내의 대립을 넘어 당시 유럽 전역에 만연했던 파시스트의 기운과 이에 대항하고자 하는 세력들 간의 충돌로까지 비화되었던 사건이었다. 전쟁은 결국 파시스트 군부 세력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수십 년 간 이어진 프랑코 독재 하에 어느 한쪽의 기억만이 공식적 역사로 강요되었다. 하지만 민주화로의 이행기 과정에서 과거를 들추고 처벌하는 등의 청산 과정에서 더 많은 혼란이 야기될 것을 우려하여 ‘망각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내전을 겪지 못한 오늘날 세대들에겐 그저 따분한 옛이야기일 뿐이다. 이러던 와중에 한때 작가였던 로라는 스페인 내전 특집에 관한 신문 기고 글을 부탁받고, 글을 쓴 이후 어떤 사람의 편지로부터 내전 막바지 집단 총살의 현장에서 도망친 작가이자 팔랑헤당의 창립 멤버였던 산체스 마사스가 어떤 공화군 병사에게 발각되었음에도 모른 척 지나간 탓에 살아날 수 있었음을 듣게 되곤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결국 로라는 이 산체스 마사스라는 사람이 쓴 모든 글부터 행적에 대해 추적하게 되고 그를 살려준 병사는 누구였을지, 어떤 생각이었을지 등의 생각을 떠안은 채로 여기저기 향하게 되고 끝내 미라예스라는 이를 프랑스 디죵의 한 양로원에서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 망각협정의 과정에서 지워져 버린 역사의 상흔을 몸소 겪어낸 이들에 대해 잊지 않겠다는,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다시 찾아뵙겠다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네 가지의 영화는 각각 역사적 트라우마의 현대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비록 그것이 그 트라우마가 발생한 시점으로부터의 물리적․시간적 거리에 따라 조금씩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넘어 각각의 영화에서 선택한 구조에 따라 재현되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양상도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점이다. 영화에 있어 재현의 형식이 그 내용의 효과를 결정하듯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되는 측면이 분명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그 구조와 형식적 특성에 입각하여 영화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마추카>는 연극에 비유하자면 세 가지 장으로 구분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커다란 벽에 새겨진 글씨들이 영화의 시간적 상황을 드러내 주며 각 상황을 구분해주는 데 처음에 ‘내전은 없다(No a la guerra civil)’라고 적혀있던 벽은 어느새 앞의 No가 X표 쳐진 채 ‘내전(a la guerra civil)’ 중임을 알려주고 이후 모든 글씨가 통째로 페인트로 덮여 덩그러니 남은 벽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 벽의 글씨에 따라 영화 역시 세 가지 장으로 구분되는 것이고 마지막의 페인트칠 된 벽에 엄연히 남아있는 이전의 글씨 흔적들을 통해 현실 또한 덮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기억이 각자에게 강하게 아로새겨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처럼 좌우파간의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 속에 결국 친구도 잃고, 계급 간에 놓인 드넓은 거리만을 확인한 이 기억은 누구에게 남아 있다는 걸까? 영화 제목이 <마추카>라는 데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는 주인공이 마추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 내내 카메라는 곤살로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마지막 장에서 이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마추카는 없다. 전쟁놀이하는 아이들 사이를 마추카네 마을로부터 도망칠 때 탔던 그 자전거를 탄 채로 유유히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온 곤살로는 다시 멀리서 불타버린 듯한 마추카네 마을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뿌연 화면 속 멀리 걸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되는데, 이 모든 장면을 통해 감독은 결국 곤살로라는 백인 아이의 기억에 남은 타자로서 마추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벽에 새겨진 흔적처럼 강하게 남은 그 기억 속에 마추카가 이후 어떤 현재적 양태로 빛을 발하는지 우리는 각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모습을 비추는 데서 그치는 이러한 특징 또한 다른 세 영화와 구분되는 <마추카>의 특징이기도 하다.
<살라미나의 병사들>에서는 과거 세대의 트라우마와의 만남을 읽을 수 있다. 주술사 친구 콘치의 말에서 드러나듯 스페인 내전은 젊은 세대에겐 따분한 이야기이고, 서점 직원의 말에서처럼 우파 산체스 마사는 관심조차 주기 아까운 역겨운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택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서술자 설정과 역사적 사실의 ‘추적’이란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편지나 흔적을 따라 쫓아가는 영화에서 산체스 마사스, 서술자이자 화자인 로라, 미라예스라는 세 가지의 층위는 프랑스 디죵 양로원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이는 현재 세대와 과거 세대의 만남임과 동시에, 더 이상 들여다볼 가치도 상실한 우파와 좌파 간의 대립을 넘어선 만남이기도 하다.
더불어, 작가의 분신이자 현재 세대의 대표자이기도 한 서술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접하고 이후 이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공간을 마련해 놓음으로써 현재의 세대가 집단적 기억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숙고를 가능케한다. 이를 통해 작품에서 서술되는 사건이 과거의 기억을 구성하는 많은 정보 중 하나로 그치는 것을 넘어 후대의 서술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다가가는지를 밝힘으로써 내전이 후대에 집단적 기억으로 남게 되는 방식까지도 논의의 장에 내어 놓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특별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그저 그런 스페인 사회의 보통 시민들이 묻혀있던 인물이나 사건의 진실에 다가섬으로써 역사적 의식을 갖게 되고, 잊혔던 내전의 진실이 스페인 주류 세대의 집단적 기업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살라미나의 병사들>에서 택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재현 양식은 현재 세대의 감정 이입의 모습을 엿보게 하고, 이를 통해 세대 간, 보다 나아가 이념적 단절의 극복의 시작점으로서 기능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더 이상 ‘망각’된 것이 아니라, 다시 마땅히 기억할 것으로 격상된다.
한편, <박하사탕>과 <히든>은 하나의 작품 혹은 예술 장르로서 영화의 위치를 넘어 현실로 그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침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위의 두 작품과 구별된다. 우선 <박하사탕>은 7개 장으로의 구분 속에 20년이라는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플래시백의 기법과 장과 장 사이에 기차가 철로를 타고 움직이는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현재로부터 과거로 시간이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불어넣어준다. 이 과정에서 영호의 이야기 속에는 자주 기차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바닥에 누워있는 영호의 머리 위로 기차는 지나가고, 권총으로 자살하려다 돌아설 때도 기차가 지나간다. 순임의 남편을 만날 때도, 순임이 준 사진기를 못 쓰게 만들 때도, 자동차 안에서 여직원과 섹스할 때에도, 잠복근무 끝에 학생을 체포할 때도, 사랑하는 순임을 떠나보낼 때도 기차는 무심하게 마치 아무런 일이 없다는 양 평온히 지나간다. 늘 영호 옆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냉정하게 그에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지나가는 기차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을 역으로 밟는 과정의 끝에는 5월의 광주에서의 총격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기차가 유일하게 멈춰있다. 이를 통해 영호에게 박제된 채 강렬히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을 은유하는 듯하다. 결국 플래시백 기법에 의거한 기차를 통한 과거 기억의 재현은, 그 기억이란 것이 단순히 과거의 전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현재적 기억임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재현 속에 더욱 눈여겨볼 점은 7개의 장 사이사이에 암전과 더불어 몽타주로서 삽입된 거꾸로 움직이는 기차의 이미지이다. 어떻게 보면 삶과 시간에 대한 가장 흔한 상징인 기차는 이 속에서 영호라는 주인공의 인생행로에 대한 단순한 상징을 뛰어넘어 영화의 줄거리와는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장치이다. 달리는 기차는, 마치 이야기의 배경처럼 혹은, 이야기의 틀, 프레임처럼 이야기의 바깥에 존재하고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영화의 이야기에서 잠시 돌아서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시간들을 돌아보도록 기능한다. 이처럼 기차는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에도,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의 시간들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음을 알려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박하사탕>을 보며 대상물로서 영화를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나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야흐로 관객으로서 자리에 앉은 채 ‘이건 영화였지’라고 자위하며 자신과 거리를 두도록 놔두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을 환기시키는 침투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앞서 두 작품을 통해 주체적 관객의 입장에 섰을 때만 비로소 생각해낼 수 있는 거리의 좁힘이나 이해 같은 것을 행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그 순간과 동시에 이것이 곧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히든>은 이에 비해 보다 은밀하지만 노골적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 자체가 관객들 앞에 배달된 하나의 테이프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영화를 보는 나까지 영화의 구조 안에 온전히 담아내 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보다 우선하여 영화 속에서 어릴 적 있었던 일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인물들의 반응 및 시선에 대해 살펴보자. 적어도 영화 속에서 이 문제는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가’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죄의식을 기억하고 발설해야 하는 공포에 휘둘린 자가 오히려 타인에게 그 죄의식을 전가하고 폭력마저 휘두르는 권력관계를 엿볼 수 있다.
알제리인 형을 받아들이기 싫었기에 ‘나를 위협했다’며 마지드를 모함한 조르쥬는 결국 뒤늦게 과거를 기억은 해내지만, 반성하진 않는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서도 과거와 똑같이 알제리인이 자신을 협박한다는 혐의를 너무 쉽게 만들며, 자신의 무례함과 마지드의 억울함이 고스란히 담긴 테이프를 보고도 그는 성찰하지 못한 채 “테이프만 보면 내가 더 과격한 것 같다”라고 변명하고, 마지드의 억울함과 심정은 생각지 않는다. 두 번이나 모함을 받은 그가 눈앞에서 죽어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라고 말하며 극장에 가서 기억을 씻어낸다. 찾아온 그의 아들에게도 위협을 느낄 뿐 사죄하지 않는다. 한편 마지드는 테이프를 보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함에도 이를 믿지 않고 죄를 덮어 씌우며 정작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는 조르쥬 앞에서 평생 식민지인으로 살아온 알제리인들의, 억눌린 현실에 대처하는 마지막 방법으로서 목에 칼을 그어 자살한다.
이처럼 누군가가 비디오를 보낸 영화의 구조 안에서 억눌렸던 알제리인과, 이를 억눌렀던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사이의 권력관계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한 감정의 위계까지 관장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 영화 역시 우리에게 배달된 하나의 ‘몰카 테이프’ 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그 영화를 비추는 또 하나의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영화 속의 진실은 제작자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까지 어느새 영화의 구조 안에 포섭됐음을 의미한다. 이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알제리인 사건은 단순히 저 먼 프랑스의 일이 아니게 된다. 곧잘 잊기 쉽고 지워지기 쉬운 수많은 기억들, 나의 또 다른 치부들이 있지는 않은지에 새삼 전율케 되는 것이다. 본디 기억이란 것이 휘발되기 쉬운 것임을, <박하사탕>에서와 같이 단선적이고 인과적인 관계로 얽히기 힘듦을 상기시켜볼 때 우리는 <히든>에서 만들어내는 그 구조 안에 포섭되어 더욱 스스로를 반성케 되는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고,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트라우마 재현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각각의 영화들이 설정한 형식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트라우마들이 재현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각각의 영화들은 그 재현에 대해 나름의 마침표로서 종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들이 각기 지니는 효과와 반면 한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결국에 자기 내면의 과거 기억과의 화해, 그리고 상대방과의 화해가 역사적 성찰의 목표라는 전제 하에 각각의 탈출구로서 해소점들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박하사탕>에서는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 5․18이 개별적인 역사 사건이 아니라 현재까지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인간이 역사적 사건의 기억 속에서 결코 치유되지 못하고 외면당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비극을 형이상학적이고 예술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호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시간의 현재성을 드러내고, 과거는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 진행형임을 지적하여 이에 대한 성찰 또한 필요함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과거를 빼놓은 채로 그 사람을 논할 수 없으며, 때문에 과거를 끌어안았을 때 그 사람 역시 끌어안을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뿐이라는 한계 또한 간직하고 있다. 즉 현재 진행형임을 깨달을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 그쳐 궁극적인 해소점으로서 어떤 제시를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며 기찻길에 뛰어든다. 물론,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근원적인 문제로부터의 해소를 가능케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마추카>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곤살로, 마추카, 그리고 실바나가 연유를 입에 넣은 채로 서로 키스하는 장면이다. 마치 가장 순수한 형태로서 젖먹이 하는 아이와 같이 서로를 호흡하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계급을 초월한 서로 간의 인간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로의 입술에 닿음으로써 체온을 느끼고 타액을 교환하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이들의 행위, 그리고 뒤섞임을 통해 계급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따뜻한 인간이라는, 연대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분류나 딱지를 넘어서 모두 하나의 사람이라는 생각 속에서 타인은 비로소 남이 아닌 나가 되고, 공감의 공간이 넓혀져 나타나는 것이다. 이 지극히 단순한 원칙 속에서 우리는 시대적 갈등과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읽어내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한 한계 또한 매우 명확하다. 굳건해 보였던 우정의 상황들 속에서도 옷이나 신발, 집 등에서 이들의 차이 및 균열의 지점은 비교적 명확하고 끝내 내전이라는 현실적으로 엄혹한 상황 앞에 이 약한 연대의 고리는 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계급 간의 강고한 장벽을 꽤나 잘 인식하는 편인데, 서로 친구라는 말을 비웃고 잔인한 현실을 지적하는 마추카 아버지의 말이나, 책 '외로운 방랑자 The Lone Ranger'에 대해 백인과 인디언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실바나의 말, 그리고 교회에서 학부모들 간의 논쟁 등은 이 한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같은’ 인간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아비규환이 된 거리 속에서 균열이 보다 명확해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이젠 이전의 연유 키스도 서로 간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결국 마추카의 마을에는 군이 진입하여 여기저기서 폭력이 자행되고, 실바나는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고 이 모든 상황의 속에서 "난 여기에 살지 않아요!" "날 봐요"라고 자신의 나이키 신발과 잘 빠진 옷들을 보임으로써 등을 돌리는 곤살로와 이를 멀리서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마추카의 모습에서 이들 사이에 놓인 거리는 절정이 된다. 멀리 바라보는 곤살로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와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회색빛 연기는 이 비극이 단순한 시대사적 비극을 넘어 개인에게 강하게 새겨짐을 은유한다.
<살라미나의 병사들>에서 작가 로라는 추적의 과정을 통해 미라예스와 같이 잊힌 사람들의 노고를 깨닫게 되고 ‘잊지 않겠다’라며 거듭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되뇐다. 이는 적어도 역사가 기억과 망각 사이의 투쟁이라는 말을 인정한다면, 혹은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미라예스와 같은 이들이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감사하단 말 한 번 들은 적 없이, 수십 년 세월의 고생이 ‘없는’ 듯 무화되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의의를 잃어버리기 십상임을 상기시켜볼 때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투쟁하는 것은 결국 그 인정을 위함이 아니던가? 해고된 노동자들로부터 위안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결국 작가 로라를 통해 자신의 추적 결과물들을 머리 속에서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심리적 전이의 가능성을 우린 엿볼 수 있고, 나아가 공식적 기억으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잊힌 혹은 은폐된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한계를 지니고는 있는데 앞서 <마추카>에서도 드러나는 감상주의와, 한편으론 영웅주의의 모습이 그것이다. 즉 기억이라는 것은 망각에 대한 투쟁에 비유될 만큼 견고하고 부단한 작업이 필요한 것인데 반하여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그저 안쓰러움과 미안함에 의거한 말 뿐이기 때문이다. 영웅주의는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준 의문의 병사를 미라예스로 점찍어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 상의 완벽함을 끌어내고자 하는 로라의 태도와 관련된다. 그는 헤어질 때까지 “산체스 마사를 살려준 것은 당신이죠?”라는 물음을 놓지 못한다. 인사를 하고 택시에 타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잊지 않겠다”는 말을 연발하지만 말이다.
<히든>은 어쩌면 가장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죄의식과 관련하여 트라우마 사이의 위계를 잘 보여주되, 힘을 지닌 누군가에겐 그냥 잊히기 마련인 기억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삶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서 기능하고 이를 평생 떠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평생 죄책감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는 마지드의 자식 앞에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은 채로 도리어 화를 내는 조르쥬의 모습에서 수많은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찰이라는 것이 없을 수도 있음을, 그냥 잊어버리고 말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한계들 속에서 그나마 2세인 자식들 간의 대화 장면 혹은 테이프 장면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일말의 희망 여지를 영화는 남겨둔다. 이전까진 전통적 관계로서 식민지인과 피식민지인 사이에 서로의 존재가 삭제된 데 머물렀으나 이젠 대화를 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그것의 성찰과 역사의식의 성숙이 근본적인 목표 및 지향점이라 했을 때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전술한 바와 같이 죽음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모든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지는 몰라도 말이다. 각각의 영화는 처음에도 언급했다시피 그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즉 물리적 거리에 따라 각기 다른 트라우마나 기억의 양태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나름의 해결 지점들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새겨지던 때이든, 흔적으로 남아있던 때이든, 그것을 잊고 살았던 때이든, 혹은 내가 겪지 못한 이전 세대의 이야기였든 모두 그 트라우마란 것을 궁극적으로 해소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주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라카프라는 후대의 개인이 불행한 역사 경험의 주체적 입장이 되는 심리적 전이의 관계(transferential relations)를 맺고, 트라우마를 초래한 충격적 경험을 재연(acting out)하고 이로써 종국적으로 과거의 고통과 희생을 애도(mourning)할 수 있는 해소(working through)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주로 연구한 홀로코스트의 경우 당사자들 대부분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사자보단 이후 세대의 교육과 같은 지점에 방점이 찍힘으로써 이와 같은 말이 가능해지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을 끌어안고 끙끙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해소 혹은 치유라는 것은 없는, 허구의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말이다. 나는 오히려 <히든>에서 드러나듯, 상처라는 게 봉합 혹은 봉합된 듯한 착각 속에서 우리는 이를 곧잘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같은 판단에 이르게 됐다. 그냥 잊혔다가 다시 환기되었다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상처는 그저 덧나거나 봉합되거나 혹은 봉합되었다는 환상만을 남길뿐 계속해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으로 치유 같은 건 없다, 우리 모두는 그저 아플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라깡과 통하는 지점 또한 있겠다.
이와 같은 지점들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그 기억과 마주하며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되지 않나 싶다. 애초에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낫는다라는 말은 타자를 없애고 내가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를 살려두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이라면, 아니 우리는 나(=타자)이기에 치유될 수 없고 근본적으로 내 안에 이미 항상 타자가 깃들어 있다면,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타자의 제거를 통한 나의 일관성 유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트라우마의 해소 혹은 말소 혹은 삭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로 포커스를 옮겨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위에서 지적했던 각 영화들의 한계가 극복되는 지점 또한 열리게 된다. 가령 내전이 끝난 뒤 <마추카>에서 학교에 마추카와 같은 가난한 친구들은 자리를 잃었지만, 곤살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시험에서 백지를 냄으로써 자그마한 저항을 한 후 불타버린 이전의 마추카가 살던 마을의 풍경을 바라본다. 이전보다 조금은 성장한 듯한 곤살로의 모습에서 이후 칠레 재건 과정에서 마추카와의 짧지만 강력했던 기억 속에 자기와 다른 경제적 계층에 놓인 이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살라미나의 병사들> 역시 한계에도 불구하고 로라와 미라예스 간의 포옹 장면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러한 감정적인 교류 안에서 유대의 감정이 생겨나고, 이러한 감정 없는 머리로만 행해지는 사변적 이해는 행동을 추동케 못하는 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살라미나의 병사들>은 실제로 소설로 출간된 이후 엄청난 파급적 효과 속에 그동안 조망받지 못하고 잊혔던 이들의 삶들을 복원해내는 것을 보면 그 의미가 없다 하긴 힘듦을 알 수 있다. 백인인 조르쥬가 유색인 마지드에게 위협감을 느끼는 이유가 다름 아닌 과거사를 반성치 못하고 타자에게 혐의를 덮어 씌우기 때문이란 진실을 보여주는 <히든>은 인종간 갈등이 역사적 연원과 정치적 힘의 관계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가해자의 죄의식이 오히려 피해자에 대한 공포와 가해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통찰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으로서 조르쥬의 아들은, 마지드의 아들에게 화합의 대상인 것이다. 이 모든 데서 드러나듯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의 확장,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트라우마는 말소될 순 없어도 끌어안고 어떻게든 다시 그것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점들에서 볼 때 <박하사탕>의 영호에 대한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다. 순임 씨를 외치며 흐느낄 때 보다 감싸 안아 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마지막 야유회에서 누군가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폭력적이고 난폭한 영호의 이면에 티 없이 맑은 순수함이 있었음을 보며 조금은 진득하게 기다려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그때도 영호는 죽음을 택했을까? 이 모든 것들은 트라우마의 해소를 도달할 수 없는 지점으로 설정하고 포기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고개를 돌려 재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단순히 트라우마와 마주하기를 넘어 지금까지 살펴본 영화 같은 매체들은 어떤 지점에서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걸까? <마추카>와 같이 제아무리 현장성을 살리고 다큐멘터리와 같은 방식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조명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폭력은 재현할 수 없으며 이 안에서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가 빚어짐을 고려해볼 때 이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폭력이 일어나는 순간 영화 카메라는 그곳에 없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이 영화화된 것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라는 매체가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지점은, 이 시간의 간격이란 것을 굳이 봉합하지 않고 그 거리를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관객에게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데서 시작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수용자 역시 마찬가지로 이를 인지하는 데서 나름의 의미들을 획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는 미시사적 관점에서 영화를 통한 서술 혹은 이야기 방식이 지니는 의미를 조망할 때 그 가치가 더욱 증폭되는데, 무엇보다도 재현 자체의 불가능성과 관련하여 일종의 재구성된 텍스트로서 영화를 생각할 때 더욱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역사를 재현한 최초의 영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만든 감독은 영화가 역사 교과서를 대신할 거라고 예언하면서 영화의 역사 서술성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전함 포템킨>, <10월>과 같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기록 필름이 아닌 재현의 방법을 사용하여 당시 현실과 사상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했다. 특히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다룬 <10월>이나 나치 전당대회의 <의지의 승리>와 같은 데서 드러나는 영웅주의적, 거시적 차원의 시각은 초기 영화들의 특성을 어느 정도 드러낸다. 이와 달리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네 편의 영화에서 보듯, 현대 영화들은 구성원들의 무의식 속에 내재하는 서사구조로서 하나의 역사(History)를 타자화시키며, 역사를 둘러싼 해석의 싸움이 시작되고, 상이한 서사들 간의 대립은 집단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들(histories)로 발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거대 담론 속에서 지워지고 삭제되었던 개개인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복구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둘이 공유하는 기억, 복수가 공유하는 기억의 역설”이라며 “다양한 층위의 과거는 더 이상 하나의 동일한 인물, 가족, 집단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기억을 구성하는 비-소통하는 장소들과 같은, 아주 다양한 인물들에게로 귀착되는 것이다”라 지적한 것과 일맥상통하여 기존의 역사라는 것이 권력의 지닌 이의 소유물이었던 것으로부터의 평등적 전환이 가능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과정들 속에서 해소까진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겐 교훈이 되고, 위안이 되고, 또 감정 이입이 되고, 이해의 가능성을 넓히며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세계 간의 만남에 있어 또 하나의 세계로서 기능하는 영화. 트라우마를 해소시킬 수는 없더라도, 앞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 함께 살아감에 있어 이해의 여지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상호텍스트성에 의거하여 특별히 과거를 회의와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 교훈을 얻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과거를 창작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맥락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최근의 영화들은 더욱 다채로운 향기를 뽐내며 이해 가능성의 영역을 더더욱 확장해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네 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듯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실로 풍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논문>
김용희,「역사 기억을 영화화하는 몇 가지 방식」,『문학과 영상』Vol.5 No.1, 55-74쪽, 2004.
남완석,「현대 예술 및 문화 : 미하엘 하네케: 폭력의 일상성에 대한 거리두기적 관찰 -<하얀 리본>을 중심으로」,『브레히트와 현대연극』Vol.24, 321-346쪽, 2011.
심은진,「이미지의 시간성 : 바르트와 들뢰즈의 이미지론을 중심으로 살펴본 이창동의 <박하사탕>」,『불어 문화권 연구』Vol.14, 82-103쪽, 2004.
______,「〈밤과 안개〉에 나타난 기억과 재현의 문제」,『문학과 영상』Vol.10 No.3, 665-680쪽, 2009.
이현진,「5·18 영화의 전개와 재현 양상 연구 : 영화의 역사 서술 가능성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석사논문, 2009.
이형섭,「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포스트모던 인식론과 포스트 콜로니얼 서사의 불편한 조우」,『문학과 영상』Vol.12 No.1, 211-232쪽, 2011.
임호준,「'포스트모던 로칼 리즘'-뻬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문학과 영상』Vol.2 No.1, 145-170쪽, 2001.
______,「실화와 허구의 경계에서 : 최근 스페인 내전 소설의 한 경향과 역사 성찰의 한계」,『스페인어문학』Vol.48, 277-298쪽, 2008.
<신문 및 잡지>
필진네트워크,「모든 영화와 미디어는 조작이다? - 영화 ‘히든’」,『한겨레신문』, 2006.6.14.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132297.html]
황진미,「답습과 각성, <크래쉬>와 <히든>」,『씨네 21』, 2006.4.26.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38026&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