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직장인이 용재총화와 쇼펜하우어를 읽는 이유
밤이 깊으면 사물은 제 몸을 비틀어 울음을 삼킨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사람이 쓰다 버린 낡은 빗자루나 이가 빠진 절구공이가 밤이면 도깨비가 되어 나타난다는 기록이 있다. 옛사람들은 이를 ‘목석지괴’라 불렀다. 피가 묻거나 버려진 물건에 깃든 영(靈). 그 기이한 존재들은 왜 하필 가장 비루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공포의 본질은 대개 ‘모호함’에서 기인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들은 예외 없이 소름 끼치는 공포를 자아낸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이 나의 ‘표상’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도깨비란, 우리가 한때 필요에 의해 부여했던 가치를 거두어가는 순간 탄생하는 일그러진 표상일지도 모른다. 빗자루가 ‘청소하는 도구’라는 의미를 잃고 쓰레기 더미에 던져졌을 때, 사물은 비로소 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기괴한 형체로 자기를 드러낸다. 그것은 공포라기보다, 잊힌 것들이 보내는 처절한 존재의 신호에 가깝다.
자본의 최전선에서 숫자로 환산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역시 스스로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곤 한다. 조직의 부속품으로, 혹은 누군가의 수단으로만 전락한 개인은 '용재총화'속 버려진 물건들과 닮아 있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증명할 길 없는 이들은 때로 타인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서늘한 유령이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기괴한 현상들은 실은 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의지가 빚어낸 비뚤어진 거울일 뿐이다.
괴담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타인을 수단으로만 대할 때, 혹은 곁에 있는 것들의 온기를 잊을 때, 그 틈 사이로 공포라는 이름의 그늘이 스며든다. '용재총화'가 묘사하는 도깨비는 어쩌면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 부르는 서글픈 노래였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물과 인간, 그리고 나 자신에게 씌워진 흐릿한 이름표를 다시 닦아내는 작업이다. 낡은 고전 속 기괴한 이야기에서 실존적 위안을 얻는 이유는, 그 서늘함 끝에 결국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이 무심히 지나친 것들의 본질을 가만히 응시해 보았으면 한다. 존재를 오롯이 바라봐 준다는 것은 그 대상이 유령이 되어 떠돌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가장 인간적인 예우다. 시선이 닿는 순간, 공포는 비로소 일상의 평온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