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용의 글쓰기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은 없다. 무언가 기록하는 일은 오랫동안 계속해왔다.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부터 게임, 만화, 소설, 영화 등 내가 좋아하는 문화콘텐츠에 대한 짧은 감상을 네이버 블로그에 남겨왔다. 웃긴대학이라는 커뮤니티에는 짤막한 연애소설을 연재했는데, 수십개의 추천이 달리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 글쓰기에 재미를 느낀 것이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기록은 계속됐다. 매 순간 떠오르는 특별한 기억들을 기록했다. 문화생활 이상으로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했다.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남들보다 조금은 낫다고 생각하는 영역, 나의 전공인 물류 글쓰기를 시작했다. 팀프로젝트의 발표와 리포트 작성을 도맡았다. 그 내용은 하나의 글로 갈무리돼 싸이월드에 남았다. 미래의 내가 그 흔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게될지 궁금했다.
군대 복무 기간 동안은 일기를 썼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딱히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한 편씩,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날의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기장 뒷편에는 군복무 기간 보거나 읽었던 100여개의 영화와 책들에 대한 별점과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순간의 모든 기억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노트 3권이 만들어졌다.
글을 쓰는 일을 하게됐다. 그 전까지는 나의 이야기를 썼다면, 이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글쓰기, 그러니까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의 이야기를 쓰듯 글을 썼다. 팩트 사이에 소설 형식을 차용했고, 시적허용이라는 이름 하에 비문을 남발했다. 되도 않는 드립을 쳐보기도 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별 짓을 다했다. 글을 잘쓴다, 영향력이 있다 싶은 다른 매체 선배들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구했다. 그들의 글을 배껴썼다. 그들의 글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색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지금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있는가. 아니, 좋은 글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작가가 아니기에 필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위한 최소한의 기본실력을 갖추는 건 중요하다. 이게 안 되면 글쓰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노오오오력 하면 극복되긴 하는데, 평소 글을 써버릇하지 않았던 사람에겐 이거부터 고역이다. 남들 2시간이면 쓸 글을 혼자 12시간 붙들고 있는다. 사실 나는 느껴본 적이 없는 고충인데, 수많은 누군가의 글을 고치는 에디터일을 하면서 이걸 깨달았다. 쉽지 않다.
기자에게 있어서 좋은 글은 진정성에서 나온다. CLO에서 콘텐츠팀장을 맡고 있을 때 우리 기자들이 작성한 수백개의 기사 트래픽을 분석했다. 좋은 글의 기준을 '트래픽' 하나로 판단하는 것은 비약이지만, 대체할만한 다른 지표가 없었다. 결과는 명쾌했다. 필력이 아니라 취재가 중요하다. 전문성도 중요하겠다만, 그것보다는 잘 된 취재가 훨씬 중요하다. 업계 전문가들이 이야기하지 못하는, 기자만이 쓸 수 있는, 기자다운 글들이 먹힌다. 미디어의 본질이 '저널리즘'이라면, 저널리즘을 지키는 글, 기본을 지키는 글이 터진다.
오늘 점심, 한 경제매체 선배와 식사를 함께했다. 선배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널리즘을 내세웠던 매체 중 흑화된 곳을 참 많이 봤어. 난 그렇게 생각해. 미디어가 먼저 수익성, 지속가능성을 만들어야 그 안에서 저널리즘도 챙길 수 있는 것이라고. 저널리즘이 먼저가 아니야
선배가 예시로 들어준 한 논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저널리즘이 미디어 수익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결과를 밝힌 논문인데, 그 논문에는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한다. 공감한다. 그러니까 기자가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좋은 글을 쓰면서 영향력을 만든다면 그 미디어엔 어떻게든 돈줄이 붙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말이다. 그 영향력이라는 것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고되다. 수많은 타협의 유혹을 견뎌야 한다. 그 과정에 수많은 이들이 지치고, 포기하고, 무너진다. '신념'이라는 낭만주의자나 지껄일 단어로 상황을 자위하기엔 이 세상은 만만치 않다.
선배는 회의적인 내 말에 짤막하게 이렇게 답하더라.
논문을 쓰면서 그 과정까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나는 여전히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친다. <강원국의 글쓰기>. <대통령의 글쓰기>와 <회장님의 글쓰기>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가 남의 글이 아닌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고 집필한 책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한다.
처음부터 글을 잘 쓴 건 아니었다. 30대 중반까지는 증권회사 홍보실 사원으로 열심히 저녁 약속을 쫒아다녔다. 대우그룹 회장의 연설을 쓰다가 김대중 정부 때 연설비서관실로 옮겼다. 그리고 운명처럼 노무현 대통령 연설비서관을 맡았다. 지금도 책에 서명을 할 때에는 '김대중처럼 노무현같이'를 즐겨 쓴다. 누구처럼 누구같이 살고 싶었으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고, 지금은 그냥 글 쓰는 사람 강원국으로 살고 있다. (중략) 결론은 '투명인간으로 살지 않으려면 내 글을 써야 한다'는 거다. 이 책에 그 헤아림과 방법에 관한 내 생각을 담고자 했다. 이제는 나답게, 강원국답게 살아간다.
나도 나다운 글을 쓰고 싶다. 눈치 따위는 고이 접어버리고 말이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 분명하다. 그래도 하고 싶다. 속된 말로 존나 멋지지 않은가.
낭만주의자에게 어울리는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