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의 물류 침공, 그리고
언젠가 송상화 인천대 동북아물류대학원 교수와 ‘2019년 물류업계는 뭐 먹고 살까’를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물류업계의 메가 트렌드가 DT(Digital Transformation)이라 이야기되는 상황에서, 정말 새로운 기술에 열심히 투자하는 물류업체가 있을까. 물론 CJ대한통운이나 삼성SDS 같은 대기업들이 예부터 기술 이야기를 참 많이 해왔다. 요즘에는 기술이랑은 하나도 안 친해 보이는 현대글로비스 같은 업체도 우리는 모빌리티로 가야 한다니 뭐니 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문득 옛날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피터 틸>을 다룬 책을 한 권 읽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도 <피터 틸>이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명저로 꼽히는 <Zero To One>의 저자이자, 페이팔과 펠런티어의 창업자이고,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자로 이름 높은 그의 생과 경영, 투자 전략을 외부인이자 기자인 저자(Thomas Rappold)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책에서 의미 있게 본 부분은 ‘독점론’이다. 피터 틸은 “독점이야말로 기업이 성공하는 열쇠”라고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페이팔에서 불가능해보였던 성공을 만든 이유도 ‘이베이’라는 독점기업에 올라탔기 때문이고, 이후 그가 초기 투자한 페이스북이 현시대 IT업계를 주름잡는 거인이 된 이유도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독점이란 ‘차별성이 뚜렷해서 다른 회사와 경쟁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피터 틸은 경쟁은 패자나 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최대한 경쟁을 피하며 세상에 없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단순히 1에서 2를 만드는 ‘개선’이 아니라, 0에서 1을 만드는 ‘새로운 것’에 주목해야 된다. 그의 저서 <Zero To One>이 관통하는 철학이다.
피터 틸에 따르면 특히 디지털 기업이 ‘독점론’에 적합하다. 어떤 플랫폼이 우위를 선점하면 사용자 대부분이 그 플랫폼에 집중돼 네트워크 효과가 발생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의 사용을 주변에 알리게 된다. 그 뒤로는 저절로 성장세가 이어져 플랫폼 독점상태가 된다. 경쟁 상대가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거나, 설사 있다 하더라도 아주 적다. 피터 틸은 이런 독점 상태를 구축한 기업으로 ‘애플’과 ‘구글’, ‘아마존’을 예로 들었다.
피터 틸이 밝힌 뛰어난 기술기업이 완성되는 단계
1) 새로운 시장을 창조 혹은 발견하라
2) 그 시장을 독점하라
3) 독점을 강화하라
어찌 보면 한국 물류는 이미 ‘독점’하고 있다. 한국기업에게 있어 ‘물류’란 물량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매출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일감몰아주기의 온상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실제 현대기아차의 현대글로비스, 삼성전자의 삼성SDS와 삼성전자로지텍, LG전자의 판토스, 롯데그룹의 롯데글로벌로지스와 같은 물류업체들이 자회사 물량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비단 대기업뿐일까. 골목상권의 레벨로 볼 수 있는 동대문 쇼핑몰, 프랜차이즈 등지에서도 친인척을 관련 물류회사 사장으로 앉혀놓고 일감을 몰아주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물류는 자기 물량을 처리하는 것만 놓고 보자면 이미 독점이다. 한국의 공정거래법이 대기업(총수 일가 지분이 20~30% 이상인 상장사와 비상장사)의 일감몰아주기를 규제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렇기에 한국 물류는 ‘독점’할 수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피터 틸’이 말하는 독점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새로운 시장을 창조 혹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시장을 침탈한다. 예컨대 기존 화주사의 물류를 수행하던 3PL업체를 대체하는 2PL업체를 만든다. 더 나아가 2PL업체 혼자서 물류를 처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하니, 기존 3PL업체까지 연결하는 다단계 구조를 만든다. 3PL업체 입장에선 기존 자신이 처리하던 물량을 중간 수수료를 받는 어떤 업체가 가로챈 모양새가 나오니 이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피터 틸이 강조하는 독점을 강화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다. ‘독점적 기술’과 ‘네트워크 효과’, ‘규모의 경제’, ‘브랜드’가 독점 지위를 만든다.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피터 틸의 독점을 강화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피터 틸의 독점을 강화하는 방법
1) 독점적 기술
경쟁기술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으며 넓고 깊게 시장을 장악한 기술. 책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애플의 ‘IOS’,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독점적 기술의 예로 들었다.
2) 네트워크 효과
플랫폼의 매력에 빠진 사용자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플랫폼을 전파하고, 사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종국에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네트워크 효과 덕에 플랫폼의 크기가 확산되는 단계에 들어선다.
3) 규모의 경제
책에 따르면 규모의 경제는 고정비가 높고 한계비용이 낮은 경우에 효과를 발휘한다. 고정비 투자는 곧 진입장벽이 되고, 규모가 늘어날수록 비용은 절감된다. 물류와 유통사업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인데, 책에서는 규모의 경제를 만든 기업으로 ‘아마존’과 ‘월마트’를 예로 들었다. 이들은 시장의 가격을 주도할 수 있는 결정권을 확보했다.
4) 브랜드
피터 틸에 따르면 브랜드는 명확히 규정하기가 어려운 요소다. 브랜드란 고객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도 갖고 싶어하는 대체 불가능한 상품이다. 틸이 꼽은 브랜드를 만든 예로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있다. 사실 브랜드만 잘 만들더라도 ‘독점’은 실현된 것이라는 게 피터 틸의 설명이다.
물류업계에는 ‘규모의 경제’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모든 것이 부족하다. 네트워크 효과는 바랄 수 없다. 모두가 물류 서비스를 잘한다고 하지만, 누가 잘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흔한 단가 정보도 공개되지 않는다. 투명해지지 않는 물류판은 ‘폐쇄성’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있다.
브랜딩도 마찬가지다. 한국 물류기업에는 마케팅, 브랜딩을 담당하는 조직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업’이 승부하는 게임이다. 영업의 무기는 ‘저단가’다.
결국 규모의 경제를 만든 기업이 저단가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피터 틸의 이론이 들어맞는 것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도 빠진 것이 있으니 ‘독점적 기술’이다. 물류기업 스스로가 기술 역량을 내재화할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는다. 물론 기술이 있는 척은 한다. 자체 개발 기술은 아니다. 이것도 중소 IT업체에 외주준다. 송상화 교수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물류기업이 IT역량을 갖춘다고 했을 때는 대개 이랬어요. 물류기업은 물류일하고 IT는 IT업체에 발주해서 그걸 받아오는 방식이었죠. 아웃소싱 구조지, 같이 가는 게 아니에요. 그건 물류업체가 가슴까지 IT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물류기업이 IT를 같이해야 돼요. 그래서 물류기업은 IT기업 인수를 많이 해야 되고, 인수 못하더라도 IT역량을 자체적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봐요. 이런거죠. 물류 플랫폼을 돌리는데 시스템 문제가 생겼어요. 그럼 그날 밤에 바꿔야죠. 지금 세상은 스피드 싸움이에요. IT를 외부에 의존하게 되면 스피드 싸움에서 버티지 못해요. 결국 IT기업이 치고나가고 물류는 프로세스 운영해주는 회사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앞으로 어떤 기업이 물류업계에서 0에서 1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찌 보면 고착화된 물류산업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은 영원히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시시각각 물류로 치고 오는 이종산업이 던져놓는 파급을 기대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스스로를 IT기업이라고 하는 이커머스 기업 쿠팡이 택배업체를 만들었고, 마켓플레이스를 장악하고 있는 네이버는 풀필먼트를 향한 야욕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카풀 하려다가 삐끗해서 슬프긴 하지만, 카카오모빌리티의 큰 그림에는 당연히 물류가 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피터 틸의 독점은 경쟁하지 않는 시장에서 일어난다. 지금까지 경쟁자라 생각지도 않았던 이들이 물류를 집어 삼키는 상황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작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 파장이 물류업계에도 긴장감을 가지고 오길 희망한다. 역으로 물류업계에서도 이종산업에 긴장감을 주는 독점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길 희망한다. 뒤엎어진 이후에는 아무래도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