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전화하는 법>을 읽고
<기자와 전화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필자가 이야기했듯 기자는 묻고 쓰는 사람이다. 취재 분야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해당 분야의 절정고수보다 높거나, 신진 연구자보다 예리할 수 없다는 필자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현업 전문가와 비교해서, 해당 분야를 연구한 학자에 비해서, 기자는 절대 깊을 수 없다.
기자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과거 기자의 권력은 ‘채널’에서 나왔다. 그것이 종이가 됐든, 전파가 됐든, 수많은 대중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채널 자체가 힘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채널의 권력은 산산히 무너졌다. 단순 속보는 트위터에 뒤쳐지고, 방송은 유튜브에 갉아 먹힌다. 종이는 이미 네이버에 파묻힌 지 오래다.
과거 기자의 채널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했던 전문가들은 언론사 아닌 새로운 채널을 찾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유튜브에 영상을 만들어 올린다.
트래픽? 네이버 메인에 안 뜨면 1만 뷰도 못 나오는 언론사 트래픽이 무서운가. 새로운 채널들의 트래픽은 이미 총량을 비교해도 웬만한 언론사를 뛰어 넘었다. 그 옛날 채널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중동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까. 절대.
이제 기자는 기업의 마케터와,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직접 경쟁해야 한다. 이미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보다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은 무리다. 현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접근성 또한 떨어진다. 지금 당장 삼성전자 뉴스룸과 IT전문매체 아무거나 들어가서 글을 비교해보자. 그리고 무슨 차이가 있는지 느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현업과 겨뤄 당당하게 이길 수 있는 영역이 있으니 ‘저널리즘’이다. 기업에 소속된 사람으로는 이야기하지 못하는 숨은 이야기들을 중립적인 시선에서 뽑아낼 수 있다. 그것이야 말로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축복이고, 가치다.
문제는 저널리즘이 돈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언론사의 수익구조로는 ‘저널리즘’을 지킬 수 없다. 과거 언론의 채널 권력이 막강한 시절에는 현재와 같은 광고모델로 아름답게 먹고 사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봤으니까.
지금처럼 채널 권력이 무너진 시절에는, 언론사의 광고는 가성비가 안 나온다. 같은 돈이면 다른 채널에 광고를 하는 것이 유의미하다. 그럼에도 언론사 광고모델이 살아 있는 이유는 이 광고가 트래픽이 아닌 ‘관계’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란 무엇인가. 촛불 혁명이라 불리는 그날 우리가 적폐라 규정했던 그것이다.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저널리즘이 정말 언론사가 현업과 겨루면서 승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된다. 허나 지금 같은 방식의 수익모델로는 저널리즘을 지킬 수 없다. 눈 가리고 모른 척 할 수는 있겠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잔뜩 써놨지만, 일단 나부터 잘해야 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