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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용 Oct 22. 2019

뿌연 자청색의 저널리즘

기자의 경쟁력


언론과 기자를 다룬 영화는 꽤 잘 챙겨봅니다. 오늘 글은 21일 밤 후지 미치히토 감독의 <신문기자>를 보고 영화관 근처 벤치에 앉아 적고 있습니다.


이 글에 시놉시스를 넘어가는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영화는 정부 관료를 자살까지 몰고 간 한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시놉시스 끝입니다.


이 영화의 한국 개봉 포스터를 보니 거창한 키워드들이 몇 개 보이더군요. ‘국가가 숨긴 충격적 진실’이라거나, ‘가짜 뉴스’라거나 ‘여론 조작’이라거나 ‘민간 사찰’ 같은 겁니다.
 
이 영화에 그런 내용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는 충격적이기보다는 건조하고, 거창하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평범합니다. 사건의 파편을 알았지만, 휩쓸리기 싫어하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갈등합니다.
 
이 영화는 정의감으로 가득 찬 기자와 그 기자를 돕는 내부 고발자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등장인물 각자의 사연이 스스로를 움직이는 동력이 됩니다.
 
영화는 자청색의 렌즈로 인물들을 비춥니다. 그냥 자청색은 아니고 조금은 뿌연, 요즘 만들어진 영화 같지 않은 색감입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먹먹한 청색이 가뜩이나 무거운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게 만듭니다.

뿌연 청색빛으로 가득한 영화 <신문기자>의 한 장면(사진: 네이버영화)

저널리즘

얼마 전 중앙일보는 <NYT 디지털 독자 470만명 비결 “돈 내고 싶은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의 분석을 인용해서요.
 
기사는 뉴욕타임스의 성공요인으로 ‘속보가 아닌 완결성 높은 기사’, ‘경쟁력 있는 기자에 인건비 투자’, 그리고 ‘실패를 통한 배움’을 꼽았습니다.
 
현실 세계의 어떤 매체도, 어떤 기자도 이와 같은 환경을 바라지 않는 곳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못하는 이유는 존재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기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지의 경쟁자들이 눈앞에 등장합니다. 작법의 경계를 넘는 크리에이터들이, 깊이를 가진 현업 전문가들이 실력을 갖추고 기자와 콘텐츠를 겨룹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지난 번 썼던 글<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그래서 술이나 먹으러 가야겠다고 이야기했죠.
 
사실 답은 있었습니다. 기자의 경쟁력은 실무의 깊이나 인사이트가 아닌 저널리즘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해관계를 초월한 콘텐츠의 중립성, 크리에이터나 현업 실무자가 못하는 가치는 여기서 나옵니다.
 
하지만 그 저널리즘은 뿌연 자청색 안개에 덮여있습니다. 안개를 걷는 것은 쉽지만 않아 보입니다. 당장 제 눈앞에도 수많은 이해관계가 펼쳐져 있는걸요.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갈등합니다.
 
저널리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기자를 하려고 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이 좋고, 일이 재밌어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한지도 이제 겨우 5년을 넘긴 사람일 뿐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지금이 새벽 1시이고, 옆에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 감성은 아무래도 사람을 겁 없게 만들고, 내일 아침에는 이불을 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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