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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용 Jun 29. 2021

나는 반딧불

그날, 아현

10여년 전 안암동의 밤을 기억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통기타를 메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언덕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마천루라기엔 나지막한 그 곳에 다다릅니다.


높은 언덕 덕분인지 안암 전체가 굽어 보이는 그 곳. 우주의 파편과 지구의 조각이 만나는 곳. 그 공간이 만드는 감성은 특별합니다.


그날, 안암. 우리는 빛났습니다. 꿈과 미래. 이상과 신념.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뱉기 어려운 말들을 하늘에 던졌습니다. 두려움과 눈치는 딸각거리는 맥주 캔에 욱여넣었습니다.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그을린 우주에는 한 무리 별이 내려 앉았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안암의 친구는 아현동에 새 집을 마련했습니다. 천장을 열면 하늘이 보이는 옥상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는 집입니다. 이 공간에서 술 한 잔 하자는 친구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 공간이 주는 감성은 특별합니다. 높게 오른 신축 아파트의 불빛과 어둠이 앉은 재개발 예정지가 한 눈에 보이는 곳, 공사 재개와 철거 중단을 요구하는 이들이 붙어 스러진 곳, 지상의 빛과 어둠이 만나는 곳. 이 곳은 그 한복판입니다.


그날, 아현.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어떤 노래가 들립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생각해보니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술기운을 빌리더라도요. 10여년 전 우리가 하늘에 던진 별무리는 상당수가 빛나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타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버렸지.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다시 태어났지'


가만히 노래를 듣던 친구가 무심히 한 마디 던집니다. 그래도 지금, 그날 약속했던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살아간다고.


우연처럼 다가온 어떤 노래가 아현의 밤을 먹먹하게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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