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을 피할 것인가, 통제를 내려놓을 것인가
제왕절개 수술을 마친 아내는 옆에서 회복 중이고, 나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때? 감동적이지? 가슴이 막 벅차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먼저 느낀 감정은 감동이 아니었다.
걱정이었다. 그리고 불안.
아기의 얼굴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태열을 일으키는 질환들은?”
“신생아 황달에서 노란색이 아니라 붉게 보일 수도 있을까?”
“적혈구 증가, 말초혈관 확장은…?”
아이를 보는 순간,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의사가 되었다.
귀여움보다는 감별진단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나는 부성애가 부족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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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말한다.
모성애는 본능이고, 부성애는 학습이라고.
하지만 아이를 안고 있을 때의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 삶은 꽤나 계획적이었다.
의대에 가고, 대학병원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노력은 예측 가능한 결과로 이어졌고, 삶은 대체로 나의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
나는 고독보다 통제권 상실이 더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는 다르다.
아이는 계획과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아이는 사건이다.
출산 직후 나는 갑자기 인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실수할까 두렵고, 예측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전문의 7년 차였지만,
아빠 1일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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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과거와는 다른 다양한 인생의 궤적을 보며 나는 한때 이렇게 생각했다.
싱글로 살면 경제적으로는 더 안정적일 수 있다.
대신 고독이라는 리스크를 더 오래, 더 깊게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딩크로 살면 시간과 통제권을 비교적 유지할 수 있다.
대신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을 더 의식적으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이를 낳은 사람도 고독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다.
결혼한 사람도 외롭고, 가족이 있어도 공허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 걸까.
행복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인생의 선택은
행복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감당할 두려움을 고르는 문제에 가깝다.
싱글은 고독의 리스크를 감수한다.
결혼은 관계 유지의 리스크를 감수한다.
출산은 통제 상실의 리스크를 감수한다.
어떤 선택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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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독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고,
일에 몰입하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통제권을 잃는 것은 두렵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40년 동안 구축해 온 나의 시스템에
거대한 변수를 집어넣는 일이다.
시간 배분이 바뀌고,
경제적 포트폴리오가 재조정되고,
나의 욕구보다 아이의 욕구가 우선이 된다.
삶은 이제 하나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재편된다.
통제 중심의 인간인 나에게
이건 작은 변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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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왜 아이를 낳았을까.
고독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위대한 철학적 결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삶의 흐름 속에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깊이 고민해서 선택하기보다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장면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장면에 도착한 뒤에야
비로소 질문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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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안고 있으면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이 울음은 배고픔인가, 통증인가.
이 체온은 정상 범위인가.
이 표정은 불편함인가, 졸림인가.
아직 벅찬 감동은 잘 모르겠다.
대신 나는 생각한다.
이 존재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이고,
나는 그 세계와 함께 살아야 한다.
삶을 통제하려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통제하려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
어쩌면 이것이 내가 배워야 할 통합일지도 모른다.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와 비통제가 함께 있는 모순을 견디는 능력.
아마 이것이 지금 내 인생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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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가.
고독인가,
통제 상실인가.
그 두려움의 방향이
우리의 선택을 만든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결국 다른 종류의 불안을 만나게 된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사랑을 증명하는 행위라기보다
자신의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계산하고, 여전히 조심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아이는
내 삶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 존재가 아니라,
내가 쌓아온 통제의 벽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라고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확장은
아마도 천천히,
반복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감동이 아니라,
책임의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