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지피티가 그렇게 말했어요.

— AI 시대에 전문가의 역할

by 김수철


며칠 전 벤츠 서비스센터에 잠깐 들를 일이 있었다.

냉각수를 보충하려고 들른 짧은 방문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옆 상담 테이블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보였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한 남성이

어드바이저와 상담을 하고 있었다.


어드바이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였다.


“요청하신 내용이 glc 차량 코딩업데이트를 해달라고 하셨네요.

제가 잘 이해가 안돼서 그런데 어떤 코딩 말씀하시는 걸까요?”


남성은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게… 음… 그러니까…”


그리고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챗GPT가 업데이트를 하라고 해서요.”


어드바이저는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정리하고 상담을 이어갔다.


“저희도 처음 듣는 내용인데요.

가능한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상담은 그렇게 끝났고

어드바이저는 정비실로 들어갔고

그 남성은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요즘 진료실에서도

거의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챗GPT가 우울증일 수 있다고 했어요”


요즘 진료를 보다 보면

환자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제가 우울증 같은데요.”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느끼세요?”


“챗GPT가 우울증일 수 있다고 했어요.”


이제 환자들은 맨손으로 진료실에 들어오지 않는다.


• 인터넷 검색 결과

• 유튜브 영상

• 커뮤니티 글

• 그리고 AI의 분석


뭔가를 들고 들어온다.


겉으로 보면

환자들이 더 공부를 하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의료가 더 효율적으로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진료실에서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진다.


설명이 훨씬 길어졌다.



예전의 진료


예전에는 이런 구조였다.


환자

“요즘 너무 우울합니다.”


의사

“우울증이라는 것은 이런 질환이고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 방법을 설명한다.


환자는

처음 듣는 내용이기 때문에

설명을 따라가며 이해하면 된다.


설명은

직선이다.



지금의 진료


지금은 구조가 조금 다르다.


환자

“제가 우울증 같은데요.”


의사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세요?”


환자

“챗GPT가 세로토닌 문제일 수 있다고 했고요.

약은 중독될 수 있다던데요.

인지치료가 더 좋다고도 했고요.”


이제 설명은

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긴다.


환자의 머릿속에 이미 만들어진

틀린 프레임을 해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세로토닌 이론은 우울증을 설명하는

여러 가설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항우울제는 중독을 일으키는 약이 아닙니다.”


“치료는 약물치료와 정신치료가

함께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을 하나씩 설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설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진료시간은 오히려 더 길어진다.



정보는 늘었지만…


판단 능력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AI 덕분에

우리는 거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 정비

법률

투자

의학


예전에는 전문가만 알던 영역들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 자체는 분명 좋은 변화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지식 접근성이 높아진 것과

판단 능력이 높아진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AI는 정보를 준다.


하지만

• 어떤 정보가 중요한지

• 어떤 정보가 예외적인 경우인지

• 어떤 정보가 실제 상황에 적용되는지


까지 판단해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가능성을 확정처럼 받아들이고,

예외를 일반적인 경우처럼 생각한다.



전문가의 역할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의 역할이 비교적 단순했다.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 의사는 병을 설명했고

• 정비사는 차량을 설명했고

• 변호사는 법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제 정보 자체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의 역할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답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걸러주는 사람.


의사는

환자가 가져온 정보를 검토하고,


정비사는

고객이 요구한 작업이 실제 가능한지 확인하고,


변호사는

인터넷에서 본 법률 정보가 현실적으로 적용되는지 판단한다.


전문가는 점점


정보 제공자에서 정보 감별자로 바뀌고 있다.



서비스센터에서 본 장면


그래서 아까 그 서비스센터 장면이

이상하게 인상 깊게 남았다.


60대의 한 남성이

AI에게서 정보를 얻어

차량 코딩을 요청한다.


예전 같으면

그는 그런 기능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AI 덕분에

지식은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장면도 떠오른다.


만약 그 정보가 틀린 것이라면?


정비사는

쓸데없는 점검을 해야 하고,


고객은

쓸데없는 기다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런 일이

수천 번, 수만 번 반복된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비용이 된다.



AI 시대의 새로운 능력


AI 덕분에

우리는 거의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희소해지는 것은

정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정보를 의심하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은

아직까지는

AI보다 인간이 조금 더 잘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