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유신 Scott Park Aug 06. 2020

지금부터 정확히 1년 뒤, 나는 어디에 있을까?

오늘은 2020년 8월 6일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1년 뒤는 2021년 8월 6일 금요일. 그 날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 날의 가상 일기를 세 가지 버전으로 미리 써보았다. 

 


버전 1: 미국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acific Crest Trail, PCT) 길 위에서


오늘은 미국의 3대 장거리 걷기 코스 중 하나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PCT의 총거리는 4,270 km이고 완주하는 데 대략 5~6 개월이 걸린다. PCT는 멕시코 국경에서 출발해서 캐나다 국경까지 북쪽을 향해 걷는 NOBO (North Bound)와 그 반대로 캐나다 국경에서 출발해서 멕시코 국경까지 남쪽을 향해 걷는 SOBO (South Bound)로 나뉜다. 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고 7월 말에 출발할 수 있는 SOBO를 선택했다.


PCT를 준비할 때가 떠오른다. 배낭을 몇 번이나 쌌다가 풀었는지 모른다. 처음 배낭을 쌌을 때 너무 무거웠다.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다. 가장 중요한 텐트와 침낭을 경량으로 바꿨다. 숟가락을 티타늄 재질로 바꿨다. 배낭 자체도 1.1 kg 밖에 나가지 않는 O사의 제품을 샀다. 속옷도 달랑 두 벌만 준비했다. 어차피 제대로 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8월 초인데도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이 있어 고생을 했다. 눈 도끼를 가져가야 하는지 고민이어서 페이스북 PCT 그룹에 조언을 구했다. 굳이 눈 도끼는 필요 없고 아이젠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자칫 잘못하면 눈에서 미끄러져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걸음마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어제 가슴 철렁한 일이 있었다. 길 옆으로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50 미터쯤 앞 쪽에서 시커먼 물체가 반쯤 보였다. 뭐지 궁금해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뿔싸, 포악하기 그지없다는 아메리카 검은곰이었다. 다행히 덩치가 적은 새끼 곰 한 마리였다. 주변에 어미 곰이 있는지 급히 둘러봤다. 다른 곰은 보이지 않았다. 곰을 만났을 때 절대로 죽은 척을 하거나 등을 보이고 도망가면 안 된다는 조언이 떠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헤비메탈 노래를 틀었다. 배낭을 머리 위로 들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새끼 곰이 가만히 서서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시크하게 바라보더니 숲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곰이 보이지 않고 나서도 나는 붙박인 듯이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에 밤사이의 추위에 움츠렸던 몸이 깨어난다. 도시의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바람이 나뭇잎에 부딪히는 소리, 이름 모르는 새들의 울음소리,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해질 무렵 하늘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할 때부터 완전히 해가 넘어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4000여 km 중에 100 km를 걸었다. 나는 왜 이 힘든 길을 걷고 있는가? 길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자연이 나에게 건네는 말은 무얼까?       


버전 2: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서


오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섰다. 7년쯤 전에 아들이 학교 아이들과 함께 바이올린 연주를 위해 그 무대에 섰을 때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무대에 내가 서다니. 


지난 3개월간 색소폰 연습을 참 열심히 했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한인 색소폰 클럽에서 합주 공연을 계획했고 운이 좋게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여러 다른 팀들과 함께 공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클럽 회원들은 매주 두 번씩 함께 모여 맹렬히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에서 삑사리가 많이 났는데 연습이 거듭될수록 개개인의 실력이 느는 것이 보였다. 회원들 서로 간의 호흡도 좋아졌다. 알토 색소폰, 테너 색소폰, 소프라노 색소폰의 소리가 어울려지면서 아름다운 합주곡을 만들어냈다.


위에는 새하얀 와이셔츠, 아래에는 까만색 양복바지를 입고 클럽 회원들 모두가 함께 무대에 섰다. 첫 무대인 만큼 긴장감이 잔뜩 몰려왔다. 의자에 앉아 크게 심호흡을 세 번을 했다. '그래,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연습한 대로만 불면 되는 거야.' 첫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falling in love"였다. '휴, 무사히 지나갔다.' 이어 신나는 "아모르 파티"와 "아파트"가 이어졌다. 음 하나를 놓쳤지만 다행히 별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마지막 곡 "베사메무초"를 온 열정을 다해 입술이 얼얼하도록 불렀다.


합주를 끝내고 무대 뒤에서 온 클럽 회원들과 함께 얼싸안고 함께 기쁨을 나눴다. 지난 3개월간 피 터지게 연습한 보람을 느꼈다. 온 가족이 꽃다발을 들고 무대 뒤로 찾아왔다.  


버전 3: 집에서


2021년 초부터 전 세계적으로 시판된 코로나-19 백신 덕분에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코로나 관련 규제를 전면적으로 완화하거나 없앴다. 그 이후로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냄새나는 마스크도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억눌렸던 해외여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 사태로부터 해방되어 함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이 달콤한 시간은 채 3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더욱 확산이 빠른 신종 코로나-21 바이러스가 출현한 것이었다. 다시 모든 나라들이 국경을 봉쇄하고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활동은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1년 전과 마찬가지로 100% 재택근무 체제로 변경되었다. 오늘도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다. 이제는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신종 코로나-21 바이러스의 출현은 인류에게 뭘 의미하는 걸까?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인류가 다시 재앙을 맞고 있다.              




휴대폰의 달력 앱을 열어 지금부터 일 년 뒤인 2021년 8월 6일을 찾았다. 그리고 약속 하나를 작성했다. "지금 쓰는 글을 읽기."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이국땅에서 길을 잃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