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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Sep 18. 2020

이메일 한 통, 응어리 한 움큼

소설의 형식으로

띵똥. 명근의 컴퓨터에 이메일 한 통이 들어왔다. 명근은 금융업계 글로벌 회사의 한국지사 IT부서를 총괄하는 40대 초반 나이의 임원이다. 회사 내의 애플리케이션 개발, 시스템 운영, 프로젝트 관리, 정보보안 등을 책임지고 있다. 아내는 정신 상담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딸과 아들 둘 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 이메일은 같은 회사 마케팅 팀장인 준식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메일을 읽어 내려가는 명근이 얼굴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명근이 IT 임원으로서 능력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회사 사장님을 포함한 임원 전체가 수신 참조로 되어있었다. 그가 직장 생활 15년 만에 처음 받아보는 종류의 메일이었다.


명근은 순간 지난주에 있었던 준식과의 업무적 충돌이 떠올랐다. 명근은 준식으로부터 지난달 업무에 대한 자료를 요청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였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요청이었다. 명근은 준식의 담당 부서 임원과 회사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이번 달은 바쁘니까 다음 달부터 업무자료를 주겠다고 논의를 했다. 그러고 나서 준식에게 담당 임원과 논의한 대로 요청자료는 다음 달부터 주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준식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졌다.


그 메일을 받고 나서 명근은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담당부서 임원하고 얘기해서 일방적으로 그에게 통보한 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공개적인 이메일을 보내는 건 너무 심해.'

'그 이메일 때문에 회사에서 짤리는 건 아닐까?' 

'그냥 무시하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까?' 

아님 '구체적인 근거 없이 모함한 것을 바탕으로 그냥 확 인사위원회 개최를 요청할까?'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일단은 준식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미팅 약속을 잡았다. 단 둘이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명근은 준식에게 왜 그런 이메일을 보냈는지, 왜 회사 임원 전체를 수신 참조로 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과는 커녕 인사위원회를 열어서 처리하라는 말을 들었다. 만약 준식이 사과를 한다면 명근은 그냥 넘어가자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는 준식의 얼굴을 보며 오히려 명근의 마음의 분노는 더 커졌다.  


얼마 후에 미국에 있는 명근의 보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준식의 요청으로 둘이서 회의를 했단다. 그 회의에서 준식은 명근의 직원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제기를 했고, 그 예로써 바로 밑의 팀장이 이직하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명근은 그 팀장을 차기 리더로 키우기 위해 미국 보스와 긴밀히 협의해 가면서 육성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중이었다. 명근의 보스는 준식의 엉뚱한 소리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사장님은 인사위원회를 열 정도의 큰 사건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이 준식에게 개인적으로 얘기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명근의 마음속에 응어리는 딱딱히 뭉쳐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응어리는 서서히 풀어져갔다. 명근은 승진과 더불어 호주지사 시드니 사무실로 옮기게 되었다. 더 이상 준식과 부딪힐 일은 없었다. 명근의 마음속에는 준식에 대한 연민도 생기기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나고 명근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회의에서 준식과 마주쳤다. 명근은 편안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108일 글쓰기 시즌 4 - Phase 1 Day 5

"당신이 겪은 위기를 소개해주세요. 다만 그 위기의 경험에서 갈등을 극대화시키거나 최대한 과장해서 써보세요. 픽션을 가미하는 것도 좋습니다. 결말을 절대 교훈적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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