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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Mar 13. 2020

밀포드 트레킹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Day 2)

시계는 오후 5시 반을 가리켰다. 휴게실 겸 부엌에 있는 벽난로에서 나무가 타는 온기가 전해졌다. 이제는 눈에 익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트레킹을 같은 날 시작한 사람들은 3박 4일 동안 매일 밤 같은 산장에서 머물게 된다. 응급상황이 발생해서 헬기로 후송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아빠와 함께 앉아 있었다. '이 녀석 대단한 걸.' 그 옆에는 커플, 다른 가족, 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과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 트레커도 있었다. 알고 보니 뉴질랜드는 물론 호주, 일본, 미국, 인도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여있었다.


벽난로의 반대편 벽에는 잔뜩 글씨가 쓰여있는 하얀색 칠판이 보였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전등 작동시간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후 6-9시, 오전 6:30-9시였다. 전등은 휴게실 겸 부엌에만 있고, 태양열을 이용하기 때문에 밤 9시 되면 자동으로 소등이 되고, 아침 6:30에 커졌다. 다른 산장도 비슷했다. 벙커 침대가 있는 공간에는 전등이 없기 때문에 꼭 랜턴을 준비해야 한다. 


앗, 칠판에 나쁜 소식이 적혀 있었다. 다음 날 폭우가 예보되어 있었다. 예상 강수량은 160 mm. 첫째 날 둘째 날은 다행히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걸었는데, 역시나 밀포드 트랙에서 비를 피해 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오후 7:30쯤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쾌활한 여성 산장 관리인이 전체 트레커들에 산장 시설 안내, 주의사항, 날씨 등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녀는 대략 30분 동안 열정 있는 얼굴로 유머를 곁들여서 자세히 설명을 했다. 내 주요 관심사는 역시 비 예보였다. 칠판에 써져 있는 대로 내일은 비가 많이 온단다. 하지만 그 비가 내일 오전에 많이 올지, 오후나 밤에 많이 올진 모른단다.


여기에서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하루에 수십 번 아니 더 많이 휴대폰을 쳐다봤는데, 이 곳에서는 사진 찍을 때 말고는 쓸 일이 없다. "까톡" 소리도 없다. 이메일에 답할 필요도 없다. 텔레비전도 없다. 온갖  약속도 없다. 일행과 얘기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시간은 늦게 흐른다. 지루하다. 하지만 머리가 맑아진다. 가슴이 틔여온다.        


잠자리를 정리하는 도중에 한 손가락 끝이 뭔지 모르는 날카로운 것에 찔려 피가 났다. 우리 일행 중의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서 일회용 밴드를 감아주셨다. 그리고 내일 비 오니까 필요하다며 그 위에 방수가 되는 반창고도 덧대어주셨다. 일회용 밴드에 방수 반창고까지 너무 감사했다. 아내가 어젯밤에 잘 때 추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분이 배낭에서 담요를 꺼내어 아내에게 건넸다. 덕분에 아내는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분 배낭이 무거운 이유가 있었다. 그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맥심 커피를 타 먹을 때 안성맞춤인 캠핑용 주전자, 그리고 밴드, 반창고, 붕대, 비상약 등을 모두 갖춘 응급 약품 키트 등등. 함께 트레킹을 하는 일행을 위한 그분의 배려심에 감동했다.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오늘 하루 우리 일행 8명 모두 아무런 부상 없이 잘 걸어서 다행이고 감사했다. '서로 템포를 맞추고 배려하면서, 트레킹의 추억을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구나.'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산장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갑자기 번쩍였다. 이어 "우르르 콰광". 내 평생 들었던 천둥소리 중에 가장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산장 옆 돌산이 둘로 갈라지지는 않았을까? 내일 비 속에서 어떻게 걷지?' 하고 속으로 중얼대다가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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