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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Mar 15. 2020

밀포드 트레킹 : 아, 이제 살았다  (Day 3)

오르막은 더 가팔라졌다. 해발 1,154 m의 맥키넌 패스 (영단어 pass 에는 지나가다는 의미 이외에 고갯길이라는 뜻도 있다)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잘못하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지형이었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일행 중의 한 자매님이 판초우의를 쓰고 있었는데, 센 바람에 판초우의가 날리며 몸이 휘청했다. 아찔했다. 그분의 남편이 다가와 판초우의를 벗겼다.


내 신발안의 양말은 이미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팬티도 젖었다. 방수용 바지가 맘에 드는 게 없어서 '안 입어도 괜찮겠지' 하며 사지 않았는데 후회 막급이었다. 계속 부는 칼바람에 손은 엄청 시렸다. 레인코트의 소매를 당겨서 양 손을 소매 안으로 넣은 후 등산 스틱을 움켜줬다. 조금 낫긴 한데 여전히 손이 시렸다. 레인코트 안의 웃옷도 흠뻑 젖었다. 레인코트도 이렇게 계속 내리는 비에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방수가 더 잘 되는 비싼 레인코트를 사야 했었나? 배낭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온몸이 추웠다. 배에서 허기가 느껴졌다. '아이C, 춥고 배고프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안나푸르나 푼힐 전망대 트레킹이나 한국에서 한겨울에 눈이 펑펑 내리는 가운데 하는 등산보다 훨씬 힘들었다. '해발 3,210 m의 안나푸르나 푼힐 전망대도 갔다 왔는데, 해발 천 미터 조금 넘는 이 곳쯤이야' 하는 자만심이 있었었다. 하지만 쉼 없이 내리는 비와 칼바람에 그 자만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인간이 제 아무리 에베레스트에 깃발을 꽂는다 해도,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천하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내 평생의 등산 중에 제일 고생스러웠다.         


일행의 다른 분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고생스러웠음이 틀림없었다. 특히 60대 중후반의 부부, 판초우의의 주인공이자 오르막이 쥐약인 자매님,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도저히 등산 연습을 할 시간이 없었던 내 아내. 


드디어 마침내 밀포트 트랙을 발견한 맥키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보였다. 기념비고 나발이고 사진도 안 찍고 지나쳤다. 곧이어 밀포드 트랙의 최고봉인 맥키넌 패스의 정상을 아무런 감흥 없이 터덜터덜 지나쳤다. 산 정상이라 바람은 여전히 세찼다. 오직 관심사는 바로 앞에 있는 대피소였다. 바로 눈 앞에 대피소가 보이는 데 막상 걸어보니 제법 길었다. '아, 신이시여.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마침내 대피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선 등산화, 양말, 레인코트와 위아래 젖은 옷을 벗고, 마른 반바지와 반팔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건네 준 따뜻한 물을 마셨다. '아, 이제 살았다.' 그리고 배낭에서 마른 과일과 너츠 믹스 한 봉지를 꺼내 함께 나눠먹었다. 한 사람도 문제없이 모두 다 잘 도착했다.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진짜 말 그대로의 "대피"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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