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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팔청춘 May 19. 2022

아르바이트생의 비애

책,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박정훈/ 빨간소금/ 1판 1쇄/ 2019.01.11)

- 아르바이트생의 비애 -



대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쁨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용돈을 벌기 위해, 등록금을 벌기 위해,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물론 그중에는 집안의 경제적 여건이 충분해서 안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그런 경우를 봤다.


내 경우 아르바이트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내가 직접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돈을 벌고, 내가 직접 번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먹고, 여행을 다니는 것. 그것이 무척 멋있어 보였다. 어떤 점에서는 성인이 된 증거처럼 보였다. 더 이상 청소년 시절의 용돈 벌이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자립을 준비하는 단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저학년일 때까지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이 스스로 대견해 보이고, 20대를 꽤 잘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회가 아르바이트생에게 그런 좋은 시선을 주는 건 딱 대학생 때까지다. 아니 대학생인 중에서도 좋은 시선을 받진 못한다. 내가 그걸 느낀 건 아르바이트를 하며 못된 진상을 만났을 때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를 포함해 세 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카페지만 음식도 팔았고, 직접 서빙과 회수까지 해야 했어서 일손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 남자 두 명, 여자애 한 명이 함께 일을 했다.


사달이 난 건 주말 저녁이었다. 당시 나이 든 아줌마가 손님으로 왔었는데,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갔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자리에 찾아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아줌마가 무언가 막말을 하고 있었다. 듣는 게 가관이었다. 일하는 동생 옷에 뭐가 묻어있었는데,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는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내가 음식도 하고, 음료도 만들고, 설거지도 하다 보면 옷에 자연스럽게 뭐가 묻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집에서 안 입는 흰색 또는 검은색 셔츠를 가져와서 업무복으로 입고 있었다. 당시 내 옷에도 이것저것 많은 게 묻어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는 모르지만,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고 듣다 듣다 화가 난 내가 "아줌마 그딴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아요."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아줌마는 나를 쳐다봤고, 계속 쳐다보는 나를 두고 옆에 있던 사장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사장은 나를 진정시켰다. 한참을 따지다 손님은 갔고, 사장은 나에게 무어라 말했다. 나를 혼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사장 태도에 화가 더 난 건 나였다.


"저기요 사장님. 무슨 사장 태도가 그래요. 네? 아니 직원이 말도 안 되는 말 듣고 울고 있는데, 그렇게 직원 탓하는 게 사장 태도예요? 네? 말해보세요. 고작 저깟 손님이 그렇게 무서워요? 예? 말해보세요."


사장은 아무 말하지 않고 일 잘 마무리하고 퇴근하라는 말을 했다. 당시 진상은 자신이 무슨 프랜차이즈 협회 회장이라고 했었다. 그런 협회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진짜 회장인지 어쩐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본인이 뭐라도 된 것 마냥 일하는 사람을 깔보면 안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웃긴 건 그 아줌마가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 화를 낸 이유였다.


앞뒤 맥락을 더 살펴보면 당시 그 아줌마는 어떤 아저씨랑 같이 왔는데, 그 아저씨가 아줌마를 카페에 남겨 둔 채 집에 가버렸다. 이를 안 건 손님이 주문을 하려고 텔레폰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내게 "방금 저랑 같이 온 손님이 없는데, 어디 갔는지 아냐"라고 물어봤기 때문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본인이랑 같이 왔는데, 본인이 알아야지. 화장실에도 없었기에 어디 있는지 모르시면 전화를 해보시라고 했었다. 돌아온 답이 가관이다. "전화번호 모르고, 누군지도 모른다."


무슨 헛소린가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아줌마는 같이 온 아저씨에게 차인 것이다. 카페 근처에 카바레가 있었는데, 카바레에서는 아줌마 아저씨 눈이 맞으면 근처 카페에 와서 2차를 갖는 게 룰이었다. 거기에 한쪽이 마음에 안 들면 주문을 넣고, 계산하지 않고 나오는 게 룰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함께 왔는지는 모르지만, 함께 온 아저씨는 아줌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주문을 넣고 그냥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줌마는 아저씨가 이름도 모르고, 번호도 모르는 게 맞다. 그렇게 아줌마는 차였고, 기분이 나빠서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거기다 사장은 아르바이트생을 챙기는 게 아니라, 손님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거기에 아르바이트생을 혼냈다. 잘못은 그 진상이 했음에도 말이다. 아르바이트생의 비애다. 결국 더 못 다니겠다 싶었던 나는 얼마 뒤 아르바이트를 그만뒀고, 모든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두고, 카페 운영도 어려워 저서 카페가 폐업했다. 폐업 당시에도 아르바이트생들과 사장이 주휴수당을 가지고 실랑이가 있었다.


책,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는 아르바이트생들이 겪는 비애와 구조적 문제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르바이트를 해봤다면 한 번쯤 공감하는 문제들, 특히 프랜차이즈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사람들은 한 번쯤 겪어볼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최저임금을 못 받거나, 주휴수당을 받지 못하는 것, 진상들에게 받는 감정 노동,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갖는 문제와 말도 안 되는 사장의 태도 등이다. 단순히 아르바이트생들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장들의 비애와 그 위에서 이익을 얻는 프랜차이즈 기업의 구조,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 지적한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 양가감정이 있었다. 모든 아르바이트가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내가 했던 아르바이트 사장님들은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고, 앞서 소개했던 사례의 사업장을 제외하면 주휴수당도 받았고, 4대 보험도 들면서 일했었다. 그런 점에서 같은 아르바이트였어도 나는 조금은 나은 환경을 경험한 것이다. 또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자 아르바이트생이어서 겪는 문제는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앞선 사례에서 소개했을 때 여자애가 당하는 걸 옆에서 본 입장이다. 당시 진상 아줌마가 내가 언성을 높였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걸 보면서, 참 여자라는 성별이 갖는 어려움에 이런 것도 있겠구나 싶었었다.


처음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됐을 때 아르바이트는 용돈 벌고, 부모님 도와드리는 효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그랬고, 내가 함께 일한 대학생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계와 부모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존중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사회가 점점 그런 아르바이트생에게 안 좋은 시선을 보내고, 나이가 들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면 왠지 취업을 못하거나 패배자로 보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문제의식이 아르바이트생을 하대하게 만들고, 그래도 된다는 듯이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시선을 이겨내는 건 아르바이트 개개인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있지만, 그런 시선으로부터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의 사회 일원으로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지켜줄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모습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밑줄

- 맥도날드는 한국의 근로기준법에 따라 4시간 일하면 30분의 휴게시간을 준다. 이걸 정확하게 지키는 기업이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맥도날드는 지문 시스템을 통해 정확히 시간을 지킨다. 게다가 휴게 시간과 함께 햄버거를 무료로 제공한다. 그런데 이 햄버거가 직급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반 크루는 '상하이 버거'와 '빅맥'까지, 트레이너는 '더블 1955 버거'와 '시그니처 버거'를 제외한 메뉴, 매니저는 자유롭게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햄버거 카스트 제도는 직급에 따른 임금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식사라도 차별을 둬서 직급의 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일 수 있다. 매장 안의 위계를 유지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매니저는 가끔씩 알아서 크루들에게 규정 이외의 식사를 제공한다. 매니저가 보기에도 과도한 업무를 하거나 매니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 식사 규정에 없는 '슈비 버거'나 '쿼터파운드 치즈버거' 등을 먹는다. 햄버거 종류 하나로 회사는 베푼다는 생색을 내고 노동자는 고마움을 느낀다. 햄버거가 노무 관리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인센티브나 상여금이 아니라 햄버거로도 그러한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상당히 저렴하다. 게다가 이 햄버거도 크루들이 만든다. 맥도날드는 재료 값만 든다.(p.52~53)


- 편의점은 누구나 손쉽게 창업할 수 있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업종이다. 덕분에 본사는 상당한 이익배분을 챙긴다. 이 이익 배분율을 챙겨주기 위해 가맹점주는 알바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 지급, 주휴수당 미지급 따위의 원시적인 방법을 동원해 생존을 모색한다. 세련된 프랜차이즈 방식의 임금 할인도 있다. 본사는 자기 회사의 유니폼을 입은 알바노동자가 자기 직원이 아니라 가맹점주가 채용한 알바노동자라고 주장한다. 덕분에 야간수당을 주지 않고도 편의점으로부터 24시간 내내 이익을 뽑아낼 수 있다.(p.99)


- 지금까지 구조 조정하면 모두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부터 떠올렸다. 경영진이 노동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하향식 구조조정이다. 이제는 노동자가 산업 전체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상향식 구조조정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업과 주주의 이윤이라고 자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p.100)


- 수습 기간의 적용에 있어 최저임금을 10% 할인할 수 있는 조항은 최저임금의 취지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최저임금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하려는 취지라면 수습 기간이라 하더라도 최저임금 이상을 노동자에게 줘야 한다. 짧은 수습 기간이 정 필요하다면 최소한 최저임금 이상으로 지급하고 다른 노동자와 임금 차이를 10% 정도 두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p.144)


- 믿기 어렵겠지만 근로기준법에 주휴수당이 들어간 것은 1953년 노동법이 만들어질 때부터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휴수당을 상여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필요한 휴식 시간을 잘 보내라는 의미로 주는 임금이다. 노동자가 한 주 만금을 하면 힘이 든다. 그러면 영화도 보고, 좋은 음식도 먹고, 보일러나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어놓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게 다 돈이다. 게다가 심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등산도 가고, 헬스장도 가면서 노동에 적합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적합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기 위해 쓰는 돈과 시간, 노력에 대한 대가가 주휴수당이다. 그래서 주휴수당은 다음 주에도 출근하는 노동자에게만 지급한다. 이를 알고 퇴사 시점을 금요일로 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회사도 있다. 그 주의 주휴수당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p.153)


- 이런 법과 제도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믿고 자신의 권리를 외치기보다는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고 각자도생 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려는 태도(그래서 회식과 사내 정치가 중요하다), 뇌물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인지, 정상적인 법과 제도로부터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 결과인지 되돌아봐야 한다.(p.166)


- 사고가 나서 산재 처리를 하는 것보다, 사고가 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안전 교육이 대안일까? 라이더들의 오토바이 속도계를 낮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몽이 아니라 임금 체계 개선이다. 대부분의 프랜차이즈 소속 라이더들은 배달에 목숨 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근무 시간을 채우면 받을 수 있는 기본급이 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는 배달 1건당 400원, 버거킹은 500원을 추가 수당으로 받을 뿐이다. (중략) 괜히 무리하게 배달해서 과태료를 얻어맞는 것보다, 신호를 준수하고 안전하게 배달하면서 기본급을 받는 게 더 유리하다. 이처럼 라이더들의 기본급이 높을수록 오토바이의 속도는 내려간다. 기본급은 라이더들의 현실적인 안전핀이다.(p.196)


- 한국의 모든 국민은 똑같은 투표권을 가진다. 각각의 표에 가치 차이는 없다. 이제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자격 문제를 점검할 때다. '알바=시간당 최저임금'이 아니라 '알바=국민이자 인간'이다. 알바에게 어울리는 옷, 알바에게 어울리는 집, 알바에게 어울리는 밥 같은 건 따로 없다. 필요한 것은 알바에게 어울리는 나라뿐이다. 다만 동정은 금물이다.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프레임에서는 당당한 저항이 불가능하다. 동정받아야 할 착하고 불쌍한 알바노동자는 없다. 알바노동자는 하찮은 알바도, 불쌍한 알바도 아닌 자기의 삶을 사는 인간일 뿐이다. 알바의 자리에 장애인, 여성, 청년, 성소수자가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모욕과 동정이 아닌 연대와 존중, 보하가 아닌 보장이 필요하다.(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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