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돌이 막 지난 조카가 제일 많이 하던 말이었다. 병뚜껑을 맞춰놓고 “우와~”, 지나가는 나비를 보고 “우와~”, 공을 미니 농구대에 통과시키고 “우와~”, 비누방울을 보고 ”우와~“. 그렇게 감탄사를 연발하는 조카를 보고 나도 속으로 ‘우와~’ 했다. 그게 그렇게 신기한가, 신기하는 네가 참 신기하다 했다. 모든 것에 감탄하는 조카의 세상은 경이로 움투성이겠구나 싶었다. 그 세상은 참 행복할 것 같았다.
한편 어른의 일상에는 사소하고 그저 그런 일들이 더 많아졌기에, 그 틈에서 감탄할 만한 것을 감지하는 것은 큰 능력이다. 그런 ‘감지하는 능력’은 오감이 열릴수록 발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빛을 더 환하게, 움직임을 더 선명하게, 살결에 닿는 느낌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 그런 것이 ’감탄할 만한 것에 대한 감지’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감탄할 만한 것들에 감각을 온전히 여는 것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마치 꽃이 비바람과 흙먼지와 온갖 벌레에 열려있듯 그 ‘열림’을 세상에 온전히 내어놓는 느낌인데, 그것은 취약한 내 모습을 세상에 활짝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실망만 주었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나를 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온전히 여는 감각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것은 세상이 어떻든 꽃은 피우겠다는 본능 같은 것일까? 이제껏 고통과 슬픔만을 경험했던 세상에서, 남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나도 혹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많은 것에 무뎌졌고, 세상으로부터 안전해지고 싶어 두꺼운 갑옷을 입었다. 그 갑옷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이제는 한 꺼풀 벗을 때가 되었나 보다. 분명 나도 조카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감탄했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고, 부드러운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싶어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을 풀고 내 안의 가장 부드러운 것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용기와,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느끼는 예민하고 부드러운 감각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 무뎌진 세상은 재미없다. 세상은 원래 감탄사가 어울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