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만 있어도 취하는 것만 같은 영화
2024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우주연상을 제외하고서는 모든 주요 부문에서 사실상 오펜하이머의 독주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막강한 경쟁자의 독주 속에 다른 작품들은 비교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죠. 이 중 하나가 바로 <바튼 아카데미>였습니다. 언제로 하면 <The Holdover>, 즉 남겨진 이들, 낙오자들로 대충 의역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작품이죠.
작품상을 비롯해 여러 부문에 후보에 올랐지만 Da'Vine Joy Randolph 배우의 여우조연상을 제외하고는 아쉽게도 수상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아직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는데 알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제가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였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하는 '김세윤의 영화음악'에서는 김세윤 영화평론가를 모시고 정말 다양한 영화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악을 소개하는데 우연히 듣고 알게 된 작품이 바로 이 <바튼 아카데미>였습니다. 사실 작품 그 자체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감독인 Alexander Payne(알렉산더 페인)의 필모그래피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몰랐는데 Reese Witherspoon(리스 위더스푼)이 발라당 까진 전교 1등 왕재수녀로 나오는 <Election(일렉션)> 역시 이 감독 작품이었더군요.
<Election>의 영화 톤은 다소 엉뚱하고, 시니컬하지만 동시에 너무 현실적이었어서 웃프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제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던 <Election>과 더불어 김세윤 영화 평론가가 소개한 Alexander Payne 감독의 작품이 바로 오늘 다루고자 하는 <Sideways(사이드에이)>였습니다.
정말 초간단하게 어떤 영화인지 설명을 하자면 <심슨가족>에 등장하는 바트와 그의 단짝 밀하우스 중, 밀하우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주변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혹은 우리도 한 때 겪었던 또는 여전히 겪고 있는 약간의 빌어먹을 놈의 친구 관계인 셈이죠. 언뜻 봤을 때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두 친구가 지속적으로 우정을 이어 나가는데 그 관계를 면밀히 들여다 보면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철저히 이용 당하는 관계이죠. 인기 많은 애와 소위 말하는 "찐따 같은 애"의 조합으로 흔하게 나타나죠.
제3자가 봤을 때 '쟤넨 도대체 왜 친하지?' 싶겠지만 결국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바트 캐릭터를 담당하는 친구가 내내 ㄳㄲ처럼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멋진 친구 역할을 하며 관계가 생명 연장을 하고는 하죠.
둘은 대학교 신입생 때 룸메이트가 된 계기로 40대가 된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잭의 결혼을 앞두고 일주일 전에 나름의 우정여행, 총각파티 개념으로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투어를 감행 하게 되며 영화는 시작을 하죠.
여행 과정에서 관객은 마일스와 잭에 대해 점차 알아가고, 알면 알수록 둘은 정반대의 성향이고 많은 면에서 (밀하우스와 같이) 마일스가 잭에 의해 이용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단 근본적으로 마일스는 와인 애호가로서 본 여행을 통해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본인이 알고 있는 무궁무진한 와인의 세계와 매력을 선사하고 싶어 하는 반면 잭은 그저 결혼 전 낯선 여자를 꼬셔 한탕 하고자 하는 일종의 개수작만이 온통 머리를 지배하고 있죠? 와인? 관심 없습니다. 잭에게는 와인은 그저 여자를 꼬시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죠.
마일스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심지어는 우울한 반면 잭은 장난기가 넘치는 캐릭터이죠.
인생의 척도에 있어서도 마일스는 이혼을 한지 이제 2년여 정도 된 반면에 잭은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자아, 자존감에 있어서도 둘은 매우 상반된 태도를 보입니다. 마일스의 본업은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지만 늘 소설 작가를 꿈 꾸고 있죠. 하지만 그는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번번히 출판사들로부터 책 출판 거절을 당해 왔기에 본인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숨기기 급급하죠. 그런 반면 잭은 3류, 잘 쳐줘 봤자 2.5류 정도 되는 배우입니다. 단역을 전전긍긍 하다 이제는 그 마저도 끊겨 광고에서 성우로 활동하고 있는게 사실상 커리어의 전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은 본인이 배우라는 사실을 늘 표면적으로 드러내기 바쁩니다. 이성을 유혹하는데 있어 강력한 무기이고, 어찌 보면 좋은 집 여자를 만나 데릴사위가 되기 일보직전인 그의 삶에 있어 유일하게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는 요소인 셈이죠.
이렇게 상반 되는 두 캐릭터가 일주일 간 여행을 하며 사건사고가 벌어지고 다른 의미로 각자 나락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영화의 기본 뼈대입니다.
잭은 결혼 전 일탈에 대한 댓가로 코뼈가 부러지고 마일스는 책 출판이 또 거절 당하며 정신줄을 놔 버리죠.
세세한 해프닝과 줄거리는 직접 관람하여 확인 하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와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Alexander Payne 감독의 톤과 뉘앙스가 이 영화에도 묻어 있어 상당히 재밌습니다. 시니컬 하지만 웃기고 의미심장한...
그리고 당연히 영화 내내 등장하는 매개체가 와인이기 때문에 맨정신으로 보기 힘든 영화입니다. 바로 와인 한 병 딸까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비주얼과 와인에 대한 묘사가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거의 엔딩쯤에 나오는 장면인데 마일스가 '특별한 날'을 위해 따지 않고 수년간 아껴 두었던 1961년산 (!!!) Cheval Blanc 와인을 전 와이프가 재혼 후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안주 삼아 몰래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장면입니다.
저 정도 고급 와인이면 잔이 종이컵인라 한들.... 여전히 맛있을 것 같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죠. '특별한 날', 그와 더불어 특별한 잔, 특별한 안주가 뭔 소용 있나... 본인이 땡겨서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시니컬 하면서도 납득이 되는 풍자라면 풍자, 독백이라면 독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엔딩을 본 후 포스터를 다시 보고 나서야 영화 제목, Sideways의 의미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주인공, 특히 마일스는 현생이 아예 옆으로 고꾸라진 후에야 본인을 옭아매던 과거를 드디어 벗어 던지고, 특히 ㄳㄲ 같은 친구 잭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비로소 새 출발에 대한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듯 한 액션을 취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포스터 속 두 주인공이 와인 병에 갇혀 있는데 그 병이 옆으로 엎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탈출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듯이. (아이러니 한 점은 이러한 계기를 만드는데 ㄳㄲ 잭이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죠 ㅎㅎㅎ)
앞으로 Alexander Payne 감독의 영화는 더욱 챙겨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바튼 아카데미>를 기회가 된다면 봐야겠습니다. 조만간 OTT에 풀리기를 기원해 봅니다.
처음에 블로그를 시작할 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을 메인 테마로 하겠다고 선언했었든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느끼던 찰나에 이 취지와 찰떡인 영화를 만나게 된 점도 기뻤습니다.
<Sideways> 이야기는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좋은 와인과 같이 깊이가 있고 달콤새콤쌉싸름 한 맛이 모두 공존하는 그런 영화입니다.
특히 와인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잔 곁들이며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Till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