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즐거움
무언가를 순수하게 즐기는 게 남은 인생에서 더 가능할까. 정확히는, 내가 업으로 삼은 일을 행복해하며 하는 게 가능할까. 분명 처음 코딩을 시작할 때는 어려워도 새로운 영역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고, UI 개발의 특성상 내가 구현한 것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즐거움이 있었다. 여느 신입사원답게 처음 입사할 때는 나름의 포부도 있었다. 열심히 일해서 능력있는 사원으로 인정받고, 고과도 잘 받아서 승진도 하고. 어딜 가나 일 잘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는 상상을 대학시절부터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을 들으면서 회사에 대한 환상은 하나씩 깨져갔다. 우스갯소리로 SCSA 출신들은 입사할 때부터 이직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6개월의 교육과정을 겪으면서 회사생활을 이미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과정이 끝나고 실제 회사에 입사할 시기가 되어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면 SCSA 출신들만 질린 표정을 짓고 있다. 팀을 나누어 장기자랑을 하라고 해도 팀 빌딩 자체를 지겨워하고, 장기자랑은 SCSA 때 했던 걸 재탕하는 팀도 있다. 무엇보다도 SCSA 교육 과정이 정말 힘들기 때문에 회사 생활에 대한 환상은 교육이 시작된 지 일주일도 안돼서 깨져버린다. 회사란 이런 곳이구나,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노력을 아무리 해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곳이구나. 코딩을 잘 하는 동기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름 교육 과정에서는 능력자 대우를 받으며 과정을 수료했는데, 입사해서는 소위 말해 짜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육 과정을 간신히 수료하고 그저 그런 개발자로 살았던 내가 보기에 대기업은 장단점이 극명하다. 연봉이나 복지 같은 부분이야 다른 기업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좋았기 때문에 업무에 대한 장단점만 써보려고 한다. 대기업은 큰 시스템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이 시스템을 유지 및 보수하기 위한 개발자의 수도 많다. 문제는 내가 투입된 프로젝트의 시스템이 너무 크다보니 개인이 맡게 되는 부분은 시스템의 아주 일부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 프로젝트의 전체 공정을 보거나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보고 개발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말단 사원일수록 그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심지어 코딩을 할 때도 비슷한 부분은 기존 코드를 복사 붙여넣기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내 나름대로 코딩해보고 싶어도 그 코드는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코드이기 때문에 기존 코드가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기존 코드를 사용하라는 말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한 개발자가 한 시스템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개발할 게 아니라면 전체 코드의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다른 개발자가 유지보수하기 쉽기 때문이다(그래서 공학이 공학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른 사람이 흑백으로 그리던 그림을 훗 나의 팔레트에는 색상 물감이 있지..라며 갑자기 컬러링을 해버리겠다고 하면 팔레트에 물감이 없는 화가들이 나중에 그 부분을 고쳐 그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코드들은 분명 개선이 되어야 하는데, 비단 대기업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프로젝트는 일반적으로 시간이 없고 바쁘게 돌아간다. 따라서 코드리뷰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새로운 코드를 시험해볼 여력이 팀 전체적으로 없다. 그냥 개발자가 알아서 코딩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하기엔 한 명의 개발자가 실수했을 때 시스템 전체가 다운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간 큰 개발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점차 개발 문화가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개발 환경과는 아직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시스템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담당하다 보면 분명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도 전문성이 없다. 에스프레소만 주구장창 뽑아서 라떼, 콜드 브루는 만들 줄 모르는 바리스타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의외로 대기업에서 오래 일했음에도 이직이 어려운 경우도 꽤 된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 코딩을 처음 배우고 내가 코딩한 것들이 화면에 구현되는 기쁨을 맛보는 일은 이제 없어진 것 같다. 사실 코딩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해오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런 수순을 밟는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보는 걸 너무 사랑하지만 가끔은 일하듯이 영화를 볼 때가 있다. 별로 끌리지 않는 영화인데도 호평을 받은 영화들은 공부 차원에서 봐야 할 것 같다. 어려운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알고 싶지 않지만 해석을 찾아봐야 할 것 같고,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보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이제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이 온전한 휴식시간을 벗어났다. 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유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은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직장인으로 근무할 때는 영화를 볼 때도 혹시나 회사에서 연락이 올까봐 두근두근해 마음편히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사실 두시간 대응 안했다고 큰일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실제로 영화를 보는 중간에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더니 굳이 전화로 알려줄 필요 없이 다음날 출근해서 해결했어도 되는 일이라 김이 샜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이 된 후로 영화관은 더이상 마음편히 도망갈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순수하게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던 때는 어린 시절 <티거무비>를 봤을 때였던 것 같다. 너무 오래 전이라 지금은 영화 내용도 가물가물하고 내가 몇 살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초등학생 때였을 거고(찾아보니 2000년 개봉작이라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가 맞다), 지금 떠오르는 기억 중 하나는 그 날이 어린이날이라 극장 앞에서 표검사를 하면서 초코바를 나눠줬다는 것이다. 그런 소소한 극장의 센스마저 당시의 나를 행복하게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푸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내용이 어떻든 푸우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 가슴이 설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저 행복했던 기억이 가득하다. 지금 기억하는 내용은 티거가 가족을 찾고 싶어해서 푸우를 비롯한 티거의 친구들이 티거의 가족처럼 분장했지만 티거가 이내 알아차렸고, 진짜 가족을 찾아나서기도 했지만.. 아마 결말은 결국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거였겠지. 이 영화는 사실 내용이 중요하진 않다. 당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순수한 즐거움을 이제는 다시 느끼기 어려울 거라는 게 아쉬울 뿐.
리버풀에 오기 전 어쩌면 이런 순수한 즐거움을 다른 분야에서 느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루고 미루다 유학이 결정되고 나서 이제는 미룰 수 없다며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스케이트 타는 건 좋아했고, 얼음 위에서 선수들처럼 이런저런 묘기를 부려보고 싶었다. 처음 배우러 간 피겨 스케이트 수업에서 나는 내가 너무 못해서 충격을 받았지만 놀랍게도 한 시간의 수업이 무척이나 즐거웠다(감사하게도 강사님은 넘어지지만 않아도 잘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이미 잘하거나 잘할 필요가 없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어차피 잘 못하니 시덥잖은 기술 하나만 성공해도 성취감이 대단했다. 휴직을 하고 출국 전까지는 개인 레슨도 여러번 받았다. 영국에 오기 전에 스핀까지는 배우고 싶었는데, 아직도 스핀은 엉성하게밖에 할줄 몰라서 아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놀랍게도 피겨는 영화보다도 나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취미다.
유학을 결정하고 나서도 이 전공을 배우는 게 정말 맞는지 몇 번이고 고민했다. 인공지능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 적성이나 흥미보다는 정말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택한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공지능 공부가 하기 싫지는 않았지만 배우는 내내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인공지능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인공지능을 공부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진 않을까.
*<티거무비>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