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이 개봉했을 때 관객의 반응이 상당히 엇갈려서 이 영화를 봐도 괜찮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반응이 엇갈렸다는 건 호불호가 아니라 이 영화가 무서운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곡성>은 평소에 무서운 걸 잘 보는 사람은 무섭다고 했고, 무서운 걸 잘 못 보는 사람들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공포영화를 꽤나 잘 보는 축에 속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예측되지 않았다. 무서운 걸 잘 못본다는 친구도 <곡성>이 워낙 흥행했었기에 보고싶다고 했고, 같이 영화를 보게 됐다. 다행히 나도 친구도 무섭지 않게, 하지만 대단히 몰입해서 영화를 봤다. 사실 중간에 좀비가 등장하는 부분은 뜬금없어 보여서 아쉽지만 그 외에는 몰입감있고 흥미로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곡성>을 해석하는 시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해석은 결국 이 영화는 진실을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한탄하는 영화라는 것이었다. 종구는 영화 내내 무명과 일광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고, 종구의 무지는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는 파국을 불러온다. 하지만 종구가 무엇을 했다한들 진실의 조각이나 알 수 있었을까. 인간의 한계를 두고 슬퍼하는 영화는 많지만 유독 <곡성>이 파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홍진 감독의 인생관에 의심(?)이 가기도 했는데, 무지가 진정 파국이라는 결말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내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모르고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줬던 결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개발자가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일단 공부를 하는 게 싫었고, 나아가 사람의 마음을 더는 읽고 싶지 않은 생각에 대학원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하지만 내가 취업 준비를 시작한 시기는 바야흐로 취업 문이 좁아지던 시기였다. 처음 반년 동안은 서류도 통과하지 못했고, 거의 1년이 지나서야 겨우 인적성 시험과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지만 대기업은 면접 근처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차피 안될 거 많이라도 뽑는 쪽에 지원해보자 싶어서 당시 문과생만 100여명을 선발하는 삼성의 SCSA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당시에 나는 학과 사무실에서 인턴 중이었기에 인적성 시험을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공부했을 때조차도 인적성을 통과해본 적이 없었기에 기대하지 않고 시험을 봤다. 사실 인적성을 통과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 어리벙벙했을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코딩이 뭔지도 모르고 SCSA를 지원했었다.
하지만 겨우 받아든 대기업 면접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기에 그 때부터 최선을 다해 면접 준비를 했다. 일이 끝난 후와 주말을 이용해서 틈틈이 자료 조사를 해서 ppt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 어이없게도 나는 합격을 했고, 그야말로 곡성이 나는 교육과정을 거쳐 삼성에 입사하게 됐다. 지금이야 개발 붐이 일면서 문과 학생들도 학교에 다닐 때부터 코딩 공부를 하는 일이 많지만 당시 문과 출신 개발자는 겨우 1세대가 탄생했던 시점이었다. 나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순전히 우연에 의해 개발자가 됐고, 몇년 지나지 않아 희대의 행운아 취급을 받았다(나도 나름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런 시각이 억울할 때도 있다). 내가 합격한 기수 이후로는 선발 인원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데다 해당 프로그램이 명성을 얻으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개발자가 된 '사건'은 내 인생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희한한 운이었다.
유학 결심을 한 것을 두고 대단한 결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나는 코딩을 배울 때부터 언젠가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문과 출신 개발자에게 장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대 출신 개발자에 비해 근본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문과 출신이라도 금세 코딩을 배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는 울면서 코딩을 했고, 교육 과정도 겨우겨우 수료했을 만큼 코딩을 어려워했다. 입사 후 일하면서도 객체지향이 아닌 언어를 쓰는 걸 힘겨워했고, 객체지향 언어를 쓸 때도 내 부족한 부분이 드러날까봐 매일 전전긍긍했다. 이래서 문과 출신은 안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악을 쓰며 일했고, 나중에는 당연히 공대 출신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무근본을 숨길 수는 없었다. 거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IT업의 특성상 오늘 쓰는 기술이 내일 사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며 일해야 했다. 하지만 경력 쌓고, 돈좀 모으고.. 하다보니 어느새 개발자로 일한 세월이 5년이 넘게 지나 있었고, 유학을 마음먹었을 때는 코로나 사태가 발발하며 유학은커녕 여행도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지났고, 영국이 최초로 미접종자 입국을 허용했을 때 나는 다시 유학 준비에 돌입했다.
석사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둔 이 수가 내 인생을 어느 길로 이끌지 알지 못한다. 사실 유학 준비를 하면서 나는 진급을 포기해야 했고, 유학 과정이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업무와 유학 준비를 병행하면서 건강이 안 좋아진 적도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매 순간 논문과 복직 걱정을 하고 있다. 공부가 어렵고 힘들었던 탓에 정신건강에도 영향이 있어 기대했던 리프레쉬는커녕 사사휴직으로 휴직 연장을 신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종구의 딸 효진은 종구에게 뭣이 중헌지 모른다고 하는데, 나도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건 매한가지다. 거기다 인공지능이 워낙 범위가 넓고 어려운 학문인 탓에 1년을 공부했음에도 인공지능이 뭔지 모르겠다는 확신만 커졌다. 뭔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코딩을 잘하고, 나와는 달리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존재라는 것만 알게 됐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석사 유학을 선택했는데 나의 무지만 깨우치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나는 <곡성>을 아주 재밌게 봤고, 악은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도 존재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지가 파멸을 이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물론 <곡성>이 파멸을 보여줬다고 해서 나홍진 감독의 인생관을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때로 인생은 모르고 도전했기에 얻는 것들도 있고, 무지가 가져다주는 행운과 행복을 맛보는 게 인생이기도 하니까. 인간은 원래 뭣이 중헌지 모르는 존재고, 그렇기에 나처럼 쉽게 미끼를 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미끼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