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스 아웃

프로페셔널리즘이 그대를 구원하리라

by 레이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에 개봉해 많은 인기를 누렸던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내가 좋아하는 라이언 존슨 감독의 추리극이다. 대중성을 기반으로 자기 나름의 메시지를 영화마다 전하면서도 자신의 인장을 박아넣곤 하는 존슨 감독은 감독 자신보다도 영화로 더 유명한 감독이기도 하다. 데뷔작인 <브릭>도 재밌게 봤고 <루퍼>도 흥미로웠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도 나는 속으로 물개박수를 치며 관람했다. 감독을 그나마 유명하게(?) 만들어준 <나이브스 아웃>의 경우 하필 <기생충>과 비슷한 시기에 경쟁하는 바람에 흥행은 했지만 작품성에 비해 주목은 많이 못 받았는데, 영화 자체로도 재밌지만 시사하는 바도 많다. 원래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추리물에 빠져 살았던지라 후더닛 스타일의 질 좋은 추리영화가 개봉한 게 반가웠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를 다루고 있지만 나를 찔리게 하면서도 공감하게 만들었던 메시지는 프로페셔널리즘에 관한 것이었다.


탐정 브누아 블랑은 결국 진범으로부터 마르타의 누명을 벗긴 것이 다름아닌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꽤 명확하게 지적한다. 마르타는 좋은 간병인이고, 그렇기에 무게와 점성만으로 각각의 약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게 마르타를 결정적으로 구하는 계기가 됐다(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리버풀에 온 이후 회사 생활에 지독하게 지쳐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인지라 맡은 바 임무는 성실하게 수행하는 버릇(?)이 나를 예상치 못한 수렁에서 건져내리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물론 이미 번아웃이 꽤 온 상태에서 유학을 오는 바람에 열심히 했다곤 해도 내 성에는 차지 않았었지만.


연구 방법론 수업은 공대 수업이라기엔 문과 수업의 향기가 강하게 풍겼는데, 내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팀 프로젝트가 포함된 강의였다. 이론수업이 있긴 했지만 학기의 절반이 지나고부터는 각 팀의 발표가 수업의 전부가 됐고, 발표를 한 이후에는 보고서를 팀당 두 편씩 작성해서 내는 수업이었다. 심리학 전공은 사회과학대학 전공들 중에서도 유달리 팀 프로젝트가 적은 전공이었고, 나는 교양수업조차 프로젝트가 없는 수업들로 구성해 시간표를 짜곤 했다. 원래도 팀 프로젝트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학부 시절에는 프리라이더도 많이 못 본데다 대체로 좋은 팀원을 만난 덕에 자기소개서에 쓸 만한 드라마는 없었다. 그 드라마를 영국에 와서, 그것도 다른 한국인 덕분에 찍게 될 줄이야.


결국엔 그가 팀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이제부터 그를 아웃이라고 불러야겠다. 컴퓨터 과학 전공인지라 수업에는 인도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는 사람도 없는데 팀을 짜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인도인 3인방과 팀을 결성하게 됐다. 나를 배려한다고 그중 한 명이 지인이라면서 아웃을 데려왔다. 아웃은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다른 팀원이 있는데도 한국어로 나에게만 말을 걸려고 했고(사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의 대부분이 맨스플레인이었지만 딱히 그걸 지적하진 않았다), 나는 그 때마다 팀 전체에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다시 팀원 전체가 모여 회의를 할 때, 다들 말은 없고 랩탑 화면만 쳐다보기에 나는 대화를 해서 의견을 모으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와 아웃의 의사소통은 이게 전부였다. 우린 수업 외적으로도 만난 적이 없고, 팀 프로젝트를 위해 모였을 때도 별도의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팀원들이 내 말을 듣고 모니터를 접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내 태도를 지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팀에서 나가겠다는 발언을 했다.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인도인 멤버들은 어리둥절해 했고, 나는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내 생각이지만 내가 통역을 했을 때 아웃은 인도인 팀원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인도인 3인방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웃을 쳐다보았고, 민망했는지 그는 (내가 아니라) 팀에 사과를 하고 그 날의 회의는 마무리됐다.


이후로도 단체 채팅방에서 그는 묘하게 나에게 공격적이었고, 말했듯이 미묘한 사람들의 표현과 행동을 쉽게 캐치하는 나로서는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나는 결국 교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상담을 하기로 한 날 아웃은 단체 채팅방에서 폭발했고, 나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역시 내 생각이지만 그는 팀원들 앞에서 나에게 망신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수업이 끝난 직후 교수실에서 그가 보낸 메시지를 교수에게 보여주었고, 교수는 폭력적인 상황이라며 일단 팀을 나오라고 했다.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 없이 교수와 이야기는 끝났고 팀을 떠나기로 했다고 하면 된다고. 과제는 개별로 해도 되고, 그건 천천히 같이 상의해 보자고 했다. 중요한 건 네가 안전하게 공부를 마치는 거지 과제는 어떻게든 해결하면 된다는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느낄 위협과 나의 정신 건강을 걱정해 학교에 상담을 별도로 받을 곳을 알려주고 캠퍼스 샤퍼론 서비스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 날 내가 느낀 안정감은 영국 리버풀에 도착한 이래 가장 따듯한 것이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교수와 상의한 대로 팀원들에게 이미 교수님과는 팀을 떠나기로 의논을 마쳤다고만 말하고 채팅방을 나오자마자 인도인 멤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웃 때문에 나가려는 거냐며 나갈 건 내가 아니라 아웃이라고 했고, 다른 인도인 멤버들도 다 동의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심지어 아웃을 데려온 멤버는 데려온 걸 후회하는 중이라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 사이에 팀에는 중국인 멤버가 추가되었는데, 내가 팀을 나간다고 하자 별도로 메시지를 보내 열심히 해온 건 넌데 왜 네가 나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웃은 말만 많지 아는 것도 없고 처음부터 아웃의 행동이 이해가 안됐다면서 같이 과제를 할 생각은 없냐고 했다. 그간 아웃이 나를 괴롭힐 때 다들 말이 없었을 뿐 그의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고, 내가 팀에서 해온 것들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웃은 내가 팀을 나간 이후에 나에게 별도로 모욕적인 메시지를 보냈고, 나는 답장하는 대신 대화를 캡처해 학교에 신고했다. 다른 멤버들은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 아웃을 팀에서 내보내고 나를 팀으로 복귀시켰다. 이후에 아웃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학교는 나를 팀 프로젝트에서는 빠르게 보호해 줬지만 행정 처리가 늦어 아웃에 대한 제재는 거의 한 학기가 지나고서야 이뤄졌는데 내가 신고한 항목 세 건 가운데 두 건이 인정되었다.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단한 조치를 취해주긴 어렵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경고가 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 학기 분반에서는 최대한 분리시켜 주겠다는 답장이 왔다. 이후 두번째 학기에서는 필수 강의에서 종종 마주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인지 그는 나에게 더 이상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나에게 더 메시지를 보내거나 접촉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웃은 영국 대학교나 영국의 시민의식이 한국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이었다면 누군가 괴롭힌다고 해도 신고할 곳도 없고, 교수는 학생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게 자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후진국에서 왔나싶어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리버풀 대학의 화장실에는 곳곳에 괴롭힘 신고를 하라는 딱지가 붙어있곤 했다. 심지어 본인이 직접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누군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보기만 해도 신고하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이 괴롭힘으로 분류될까부터가 걱정이었는데, 교직원이든 친구들이든 내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기겁을 했다. 일본에서 만나 영국에서 재회한 인도네시아 출신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니 되든 말든 일단 신고를 하라고 조언을 해줬는데,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가 신고를 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이 친구의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팀 멤버들이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나서서 돕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점은 아직도 속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타가 특유의 성실함과 전문성으로 결국엔 누명을 벗고 할란의 유산을 모두 상속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프로페셔널리즘은 분명히 나를 구해주는 순간이 온다. 누군가가 나에게 칼날을 드러내고 위협을 가하는 그 순간에도. 그리고 <나이브스 아웃>의 진범은 어설픈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인해 결국 마르타를 공격하는 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도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나이브스 아웃>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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