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만난 사람들
아름다운 스웨덴 뱀파이어 영화 <렛 미 인>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애석하게도 두번 다시 볼 용기가 안 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예술 영화와 독립 영화에도 슬슬 발을 들이던 시절에 우연히 보게 된 <렛 미 인>은 아트 영화의 품격을 알려준 작품이자 영화 감상의 숨은 재미를 알려준 작품이기도 했다. 내가 이 영화를 두번 다시 보지 못하는 이유는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데 같은 소재를 다룬 작품 중에서도 유독 이 영화는 특정 한 장면이 가슴을 찌르는 듯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사실 폭력의 수위 자체는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가 더 세지만, 나는 <렛 미 인>에서 오스칼을 괴롭히는 패거리가 오스칼을 돼지라고 부르며 코를 튕기는 장면을 볼 때 실제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물리적인 고통을 느꼈다. 나는 그런 사소한 괴롭힘이 어떻게 한 인간의 자존감을 추락시켜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살을 고데기로 지지지 않아도, 사람을 샌드백으로 쓰지 않아도 아주 단순한 손동작만으로도 인간은 모멸감을 느낄 수 있게 진화한 존재다. 그리고 그걸 아주 잘 알고 이용하는 존재들이란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정의내리는 하급 족속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스키너 상자로 유명한 스키너 박사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스키너 박사는 인간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청소년 체벌이 금지된 것도 스키너 박사 덕분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스키너 박사를 좋아했고, 내가 습작 시나리오를 쓸 때 쓰는 가명은 레이 스키너Lay Skinner가 됐다. 대기업 최종 면접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면접관에게 나는 스키너 이야기를 했다. 스키너는 인간을 믿었고, 나도 스키너처럼 기술에 인간적인 면을 불어넣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고. 나는 면접에서 많은 헛소리를 했지만 마지막 한 마디만큼은 진심이었다. 합격에 스키너 박사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키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다 좋은 마지막 한마디였다고 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렛 미 인>의 영어 제목은 <Let Me In>이 아니라 <Let the Right One In>, 즉 올바른 이를 들이라는 뜻이다.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 오스칼에게 있어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가 마음 속에 들일 만한 존재였는지 사실 아직도 의구심은 들지만 반대로 이엘리에게도 오스칼이 자신의 마음 속에 들여보낼 만한 존재였을까. 이엘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엘리를 받아들인 오스칼과는 달리 나는 스키너 박사를 좋아하면서도 쉽사리 내 마음 속에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 오스칼에게 있어 이엘리는 독성있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조차 지켜주지 못했던 폭력에서 오스칼을 지켜준 건 이엘리뿐이었고, 그래서 오스칼은 자신이 누굴 들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을 열어 이엘리를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래서 이엘리는 자신이 아플 걸 알면서도 초대받지 못한 채 오스칼의 집에 발을 들이는데, 이 장면은 영화의 원제와 어울리면서도 반대되는 듯한 기묘한 장면이다. 두 병적인 존재가 만난 곳이 하필 일조 시간이 적은 스웨덴의 작은 마을이라는 게 대단히 영화적인 우연이지.
처음 리버풀에 올 때, 나는 어떻게든 혼자 잘 살아내겠다는 다짐을 했다. 일본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지만 그만큼 아픈 추억도 많이 만들었었다. 특히 일본을 떠나기 직전에 몇몇 친구들로부터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부터는 역시 섬족들은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쉽게 마음을 여는 사람이 아니었고, 상처받느니 시작도 안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안그래도 내향적인 편인데 이렇게 마음까지 먹으니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오래 하고 석사를 시작한 덕분에 동기들과 나이 차이도 거의 10살 가까이 났다. 모계유전으로 동안이라 망정이지 내 나이로 보였다면 나는 리버풀에서 친구를 한 명도 사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왔을 때의 다짐이 무색하게 생면부지의 땅에 홀로 떨어지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한국인이 없으면 일본인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에서는 굴지의 대기업에 재직하며 혼자서도 뭐든지 잘 해내던 내가 비행기타고 몇시간 날아왔다고 수건 한장 파는 곳을 몰라 헤매고 있었다. 이미 해외생활을 한번 해 봤기에 해외생활에 대한 로망도 없었고 적응기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바보된 기분을 꽤 오래 느낄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비로소 나는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거는 사람을 만났다.
친구들 대부분이 자신의 실명이 드러나는 걸 꺼렸지만 올리비아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니 이름 그대로 등장하고 싶다고 말해서 올리비아를 올리비아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국적이지만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올리비아는 화장실에서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어딘지 어색한 느낌은 있었지만 꽤 정확한 한국어였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올리비아는 나를 꽤 좋아했다. 그리고 West Meets East라는, 동아시아 문화에 관심있는 학생들 동아리가 있어 올리비아와 함께 가보기로 했다. 거기서 드디어 나는 한 줌의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만난 한국인은 열 명이 채 안됐지만 이후에 더 많은 한인이 리버풀 대학을 포함한 도시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만 재학 중인 한인은 학부생 비율이 높은 만큼 역시나 나와 나이 차이가 열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교환학생으로 온 학부생 친구와는 프랑스 여행을 같이 다녀오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먼저 같이 가자고 제안해주고, 일정도 대부분 짜서 언니를 모시고(?) 다녀준 그 친구에게는 아직도 고마운 마음이다. 영국에서 석사를 한것 치고는 유럽 여행을 거의 하지 못했는데 그나마 다녀온 곳 중 하나이기도 하고, 과제로 바빠서 여행 계획에 별 도움이 안됐는데도 여행 내내 나와 즐겁게 다녀주었기 때문이다.
리버풀에서 힘든 석사과정을 겪으면서 닫혔던 마음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올리비아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도 미안하지만 시간이 좀 걸렸다. 속고만 살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속고만 살지는 않았지만 뒤통수는 맞아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사람에게 나라는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걸 대단히 꺼렸던 나는 리버풀에서 그 문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사람마다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과 속도가 다른 건 당연하고, 내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어쩌면 일본에서 호되게 당했던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보호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올리비아와 친구가 되고 나서 나는 벌을 좋아하는 범블비, 취미로 춤을 추는 댄서, 우리 중 유일하게 약혼자가 있었던 반지를 소개받았다. 다른 친구 한 명이 더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친구가 되자마자 졸업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가서 취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다같이 모여서 밥을 해먹거나(나는 반지가 만든 브리야니를 참 좋아했다) 도서관에서 과제를 같이 했고, 나는 그들과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나갔다. 1학기 시험이 모두 마무리되고 다같이 브런치를 먹으면서 사실 내일이 내 생일이라고 말하자 범블비는 그걸 왜 지금 말하냐고 장난스럽게 화를 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범블비의 집에 모여서 올리비아가 끓인 미역국을 나눠먹었다. 생일이 방학이라(그리고 친구가 없기도 해서) 학창 시절에는 친구 없이 생일을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오히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커진 지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일을 보내는 게 내 딴에는 신기했다. 심지어 그날 저녁에는 한국인들과 다같이 모여 외식을 했으니까. 그날 나는 꽃을 두 다발 선물받았다.
리버풀에서 새롭게 알게 된 이들과 마냥 건전한 관계만 형성했던 건 아니다. 나는 영국에 오기 전 같이 유학을 준비한 나보다 한참 어린 동문이 있었고, 그 친구는 내가 유학을 와 있는 동안 유명세를 탔다. 별 생각 없이 같이 찍어서 인스타에 올린 사진에 몇달동안 연락도 없던 사람들이 우르르 말을 걸어 허탈감을 맛보기도 했다. 유명인은 사실 나에게는 대단히 싹싹하고 착한 후배였는데 유명인을 둘러싼 반응에 내가 지치곤 했다. 내 생일 즈음 유명인은 나에게 생일 선물을 보내왔는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친구를 태그해서 인스타에 업로드하면 누군가는 유명인과 친구라고 과시하는 걸로 비뚤어진 시각으로 볼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셀러브리티와 친구를 하면서 본인도 셀럽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유명인과 친할수록 나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나한테까지 사람들이 친구 추가 신청을 보내는 걸까 궁금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없으면 일본인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지 6개월도 더 지나서 나는 같은 전공에 있는 일본인 사자와 친구가 됐다. 내가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줄 알았기 때문에 사자와는 일본어로 대화를 했고, 그는 일본어를 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내 전공에 일본인은 사자 한명뿐이었다). 사자와는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났는데, 동안 덕분에 사자는 처음에 나를 봤을 때 본인 또래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왠지 속이는 느낌이 들어 어느 순간 결국 내 나이를 얘기해줬는데 사자는 놀라긴 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내가 이렇게 어려보이는 게 신기하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 나이를 알고 나서도 사자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밥이나 한번 더 같이 먹자고 연락을 해왔고, 돌아간 이후에도 종종 인스타로 말을 걸었다. 어쩌면 내 나이를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이 알아서 도망갈 거라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생각지 못한 인연이 닿아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정말 많다(전부 소개하기엔 한계가 있어 미처 글에 적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학창 시절의 내가 성인이 되어 사람들과 불완전하게나마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 시절이 덜 괴로웠을 텐데. 다만 1년이란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아서,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인 친구들에게 짧은 시간 충분한 애정을 표현하지 못한 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금방 문을 열고 사람들을 들여보냈다면 일본에서의 비극이 재현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리버풀에서의 1년은 잘 보냈다고 생각한다. 올리비아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모였을 때, 다들 우리가 다시 모일 수는 있을지 이야기하며 울적해했다. 그 때 나는 14년 전에 일본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영국에 오면서 재회했다고, 그러니까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저 우리는 그게 언제인지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다들 14년이라는 세월에 경악해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도인마냥 대답했다. 14년 금방 간다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법을 잘 모르던 시절, 마냥 내 쪽에서 호의를 베풀면 내 마음을 다들 알아줄 거라고 오해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예민한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세심하게 챙기고 배려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많은 건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인간관계에서 주고받아온 호의를 따져보는 버릇도 생기곤 했지만 그건 내가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감동적이었지만 결국 한 쪽이 희생해야 하는 관계고, 높은 확률로 그건 오스칼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마냥 <렛 미 인>을 즐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헤어지고, 오스칼이 어른이 되어 건강한 관계를 누군가와 맺을 수 있게 됐을 때 마침내 올바른 이를 자신의 마음 속에 들여보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엘리보다는 오스칼에 가깝기 때문에 오스칼이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길 간절히 바랐다.
*<렛 미 인>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