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언니전지현과 나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by 레이

영국에 온지 얼마 안됐을 무렵, 동문 선배에게서 재영과협 학술대회에 참석할 의향이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면 숙소와 식사 세 끼를 제공하고, 한국인들이 모인 집단에 초대받을 수 있다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겠다고 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게 학술대회는 할로윈이었고, 그래서 나는 리버풀에서 참가할 수 있는 모든 파티를 저버리고 학술대회에 참가했다. 딱히 초대받은 파티가 없기도 했고, 어차피 친구도 없는데다 파티에 가봤자 나이 때문에 나를 불편해할 사람들이 태반이니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시 학술대회는 체스터라는 리버풀 근처의 소도시에서 열려서 오가는 길도 금방이었다. 체스터는 한나절이면 둘러볼 수 있는 곳이라 학술대회 전에 여유롭게 도착한 나는 짐을 맡겨놓고 체스터 구경도 했다.


아직도 학술대회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해서 들렸던 한국어가 주는, 뭔가 상황과는 맞지 않는 것 같은 어색하면서도 반가웠던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리버풀에서 한국인들은 못 만난 건 아니지만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어린 학생들이었는데, 재영과협의 학술대회에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최소 30대에서 40~50대 분들이 서성이며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머뭇거리며 들어섰는데, 다들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시며 이름을 물어오셨다. 그 때 이름표 목걸이를 찾아 내 목에 걸어주셨던 분이 옥스퍼드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젊은 사무장님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면서는 그나마 말이라도 걸어볼 만한 분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20~3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분이 보여 같이 밥을 먹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흔쾌히 그러라고 하셔서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눠보니 신기하게도 리버풀 옆 도시인 맨체스터에서 오신 분이었다. 결국 그 날 그 분과 하루종일 학술대회를 같이 돌아다니고, 이후엔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감사하게도 아직까지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한국 독립영화고 장편 다큐멘터리다. 띄어쓰기를 안한 게 아니라 정말 제목이 저렇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내언니전지현'이 감독의 게임속 아이디이기 때문이다. 꽤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인데 코로나 시기에 개봉하기도 했고 독립영화다보니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게 아쉬운 작품이다. 나는 게임에 문외한인데 감독은 오래된 게임 '일랜시아'의 광팬이었다. 하지만 게임사에서는 일랜시아가 소구력이 줄어든 게임이라는 이유만으로 버그도 잡지 않고 오랜 기간 방치했고(사용자 입장에서는 천불날 일이지만 개발자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결국 게임 내 버그를 이용해 편법을 저지르거나 타인을 사칭해 사기를 치는 유저마저 등장하기에 이른다. 감독은 자신뿐만 아니라 일랜시아를 사랑하는 다른 유저들을 찾아냈고, 그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에 담으면서 마침내 게임사에 버그 수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른다(실제 게임사에 가서 프레젠테이션까지 했다). 내용 자체가 재밌기도 하지만 감독의 능수능란한 편집 실력을 보다보면 영화에 빨려들어가다가 종내는 감독의 덕후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재영과협은 재영 한인 과학기술자 협회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과학기술 영역에 종사하거나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과학 기술이라고 해서 순수 과학만 말하는 건 아니고 최근 재영과협에서는 분야를 다양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전공에 숫자, 데이터만 들어가도 가입할 수 있다(사실 심지어 과학과 전혀 관련이 없어도 그냥 가입해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데이터를 다루는 문과 직종 분들도 꽤 있다. 학술대회에 처음 갔을 때 하루종일 이런저런 강연을 들으면서 이런 분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덕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발을 10년 가까이 업으로 삼았고, 현재도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하면서도 전공에 큰 애정이 없는 나로서는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떤 강의는 한국어로 듣는데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연구자분이 이걸 외국에서 영어로 연구하신다는 게 존경스럽기도 했다.


내가 재영과협에서 깨달은 게 또 있다면 세상엔 정말 다양한 학문 분야가 있다는 것이었다. 문과 출신이라 주로 문과 친구들이 많았던 나는 IT회사에서 일하면서도 한정된 분야의 사람들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재영과협에서는 도시 개발학, 조선학 등 있을 거라고 생각만 해봤지 실제로 연구는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분야의 연구자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좁은 학계에 갇혀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던 한국 대학의 교수들과는 달리 이 분들은 다른 분야의 학문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물론 실제 연구 현장에서 어떤지는 나도 모른다). 워낙 박사, 교수가 널린 집단이라 나는 그야말로 석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영과협의 회원분들은 처음 보는 나를 따듯하게 맞아주며 한인끼리 힘을 합쳐 잘 지내보자고 다독였다. 파티에서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혼자 서 있는 타입이던 나는 저녁 만찬에서 대화를 많이 나누었고, 연락처도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다들 타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기억하는 걸까.


이후 재영과협에서 주최하는 워크샵에도 참석해보고, 재영과협을 비롯한 유럽의 각 국가에 있는 한인 과협들이 모여 주최하는 EKC에도 참가했다. 한 분야에 대한 열정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영과협의 행사들은 참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거니까. 감독 내언니전지현은 결국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덕후들을 모은다. 감독은 혼자 힘으로는 결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덕후이기도 하지만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산하는 온기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게임 일랜시아와 일랜시아를 사랑한 사람들을 사랑했고,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는 일랜시아보다도 동지들에 대한 애정이 더 커보이기도 했다. 같은 분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행운이다. 나에게 재영과협은 그런 곳이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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