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나의 퍼스널 큐레이터에게

by 레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들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가장 주목을 많이 받은 작품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기도 한 <드라이브 마이 카>를 고르게 된다. 일본 영화계가 애니메이션 산업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실사 영화계에는 투자도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안타까우면서도 한국 영화계도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아 사돈 남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는 와중에 혜성처럼 등장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대단히 일본스러우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스크린에 잔잔하게 담아내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이 일본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일본에 1년 살아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리버풀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사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정확히는 사자와 하마구치 감독의 다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함께 봤고, 그는 일본이 아닌 영국에서 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일본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상영시간 3시간여에 달하는 것처럼 이 챕터도 길어질 전망이다. 이 챕터를 쓰는 게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큐레이터라면 내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해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리버풀에 와서 지내면서 만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이 큐레이터일지도 모른다. 큐레이터와는 첫 학기가 끝날 무렵 한인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한인 모임이 있다는 것도 그 즈음에서야 알았고, 나갔을 때도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어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소규모로 모인데다 대부분 모르는 이들임에도 나가기로 결정한 건 순전히 내가 과거에 모임을 주최해본 경험이 있어서였다. 모임을 주최하다보면 생각보다 호응도도 낮고 인원이 적어 김이 새곤 한다. 그런 경우 한 사람이라도 더 나와주면 대단히 감사하다는 마음이 드는데, 그 날도 인원이 적길래 주최자를 위해(아마 주최자는 큐레이터였을 것이다) 일단 나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나올 생각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유학을 하다보니 유교 문화에 익숙한 아시아인들은 내 나이를 알고서는 나를 어려워하곤 했다. 올리비아조차도 처음 내 나이를 알고서는 나이를 모를 때가 좋았다고 했을 정도니까. 그래서 다들 나를 불편해하면 중간에 적당한 핑계를 대고 먼저 가려고 했었다. 그날 나는 밤 1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했지만 모른 척했고, 오토가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웃으며 집을 나섰지만 망설이다가 집에 늦어 들어가는 바람에 오토의 사망을 막지 못한다. 이후로도 가후쿠는 영화 내내 한 번도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지만 가후쿠가 감정의 파도를 겪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관객은 없다. 가후쿠는 시야가 좁아지는 병을 앓으면서도 스스로 운전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을 비집고 들어온 미사키를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미사키는 그 시간을 묵묵히 기다린다.


브런치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리뷰를 남기면서 미사키는 어쩌면 연극의 연출자에 해당하는 존재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라고 해석한 적이 있다. 미사키는 영화 내내 가후쿠의 성격을 마치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를 대한다. 나는 가후쿠와 비슷한 면이 많은데 큐레이터는 미사키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영화를 가져온 이유는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그랬듯 큐레이터도 내 삶에 어느 순간 들어와 있었던 신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는 대단히 섬세한 성격이라 나와 큐레이터를 모두 아는 지인들은 다들 그의 세심함에 놀라곤 했다. 헌데 내가 큐레이터와 알고 지내면서 깨달은 건 내가 더 섬세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세심하고 예민한 편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큐레이터를 만나고서야 그 정도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심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많은 장벽과 규칙을 만들어왔다는 것도. 외부적인 자극에 예민한 나는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편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지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났을 때 큐레이터는 나의 무엇에 이끌렸는지 나와 친해지려고 했다. 나에게 있어 그건 대단히 드문 경험이었고, 리버풀에 친구가 많지 않았기에 좋기도 했지만 처음 몇 주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문과 출신임이 무색하지만 개발자답게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잘 못했고 사회성이 떨어졌다. 언젠가 물어봐야지 하고 아직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큐레이터는 왜 나와 친해지고 싶었던 걸까.


내가 그를 큐레이터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그가 큐레이터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 클래식 공연을 보고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하는 큐레이터는 나를 알게 된 이후 종종 이런저런 공연이나 미술관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곤 했다. 어차피 친구도 별로 없고 과제만 마무리해두면 잠깐 다녀오는 건 무리가 아니라서 나는 그의 제안에 보통 응했었다. 먼저 놀자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특히 리버풀에서는 극히 적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는 게 좋기도 했다. 거기다 예민한 성격 탓에 챙김을 받기보다 타인을 챙기는 데 익숙했던 나는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는 기분을 처음 알게 됐고, 그러다보니 그를 향한 경계심이 조금씩 무너져 갔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다가 그만둔 것도 런던의 화이트 큐브에서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얘기해줬지만 사실 아주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한때 탐닉했던 예술의 세계에 다시 다가서는 건, 특히 나보다도 잘 아는 전문가와 함께 들어서는 건 즐겁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문화의 도시 런던에는 수많은 갤러리가 있었고, 비록 큐레이터와 함께 가본 곳은 몇 군데 안되지만 갈 때마다 오랜 세계를 다시 새롭게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순수하게 그림을 즐기던 시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큐레이터는 내가 취미로라도 다시 그림을 그려보길 기대한 것 같았지만 그 즈음 펜화를 그려보려다가 오랜 타이핑으로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망가져 전처럼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림을 그릴 때 나의 장점은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그리는 것이었는데 그런 섬세함을 잃었다는 건 이제 그림을 그려봤자 특별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큐레이터는, 나를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 사람인 동시에 다시는 그 곳에 속할 수 없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미술을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시야가 좁아져간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가후쿠가 이런 심정이었겠지.


어딘지 차가워보이고 업무에만 몰두하며 죽은 아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려고 하지 않는 가후쿠처럼 나는 다른 이들에게 있어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다(지금도 그렇다). 올리비아의 친구들은 내가 무서워서 말을 걸 수가 없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 평판이 신경쓰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사느라 바빠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런 말을 전해들을 때면 "I'm not gonna be someone else just because some idiots think I'm scary(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몇몇 멍청이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진 않을거야)."라고 답하곤 했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운전수가 되는 바람에 가후쿠의 인생에 끼어들었는데, 큐레이터는 내 인상이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지 별 일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곤 했다. 그게 신기해서 내가 편하냐고 몇번 물어본 적도 있었는데, 딱히 특별한 대답을 들었던 적은 없다.


영국에는 봄학기에 이스터 방학이 3주 정도 있다. 당연히도 이 때 여행을 많이들 가는데, 큐레이터가 스치듯이 뉴욕에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나중에 알게 됐지만 큐레이터는 공수표를 자주 날리는 편이었다). 그 때는 겨울이었고 영국인데 유럽을 가야지 뉴욕이 웬말이냐 싶어서 농담처럼 거절했다. 그러다가 어려운 봄학기 수업을 듣고 내 심신은 만신창이가 됐고, 여행이고 나발이고 친구를 만나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 전 나는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석사 유학을 떠나는 대학 동문들과 카톡방을 만들었고, 실제로 다같이 모인 건 단 한번이었지만 힘든 유학생활에 카톡방에서 매일같이 수다를 떨었던 덕분에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친해져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뉴욕에서 석사를 하고 있었고 이 친구를 만나서 석사생활에 대한 하소연도 하고 다른 세상도 좀 보고 싶었다. 뉴욕에는 사촌들도 있었고 해서 친구와 가족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영국에서 뉴욕을 가는 게 한국에서 뉴욕을 가는 것보다 저렴하고 가깝기도 하고. 당시 큐레이터는 뉴욕에 가자고 제안해놓고 막상 이스터 기간이 돼서는 고민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큐레이터가 가든말든 혼자서라도 뉴욕에 갈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같이 가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일단은 생략하기로 한다. 내가 뉴욕에 가기 전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건 큐레이터가 무척이나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와 큐레이터를 집에 머물게 해준 사촌언니와 형부를 비롯해 큐레이터를 만난 많은 이들이 큐레이터의 매력에 빠지곤 했다. 큐레이터는 유독 미국 한인 사회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사람들은 큐레이터를 두고 아이돌 같다, 혹은 이쁘게 생겼다고 말했다. 성격이야 가후쿠와 비슷할지 몰라도 존재감은 미사키만큼이나 없이 살아왔던 나로서는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인기인이 대체 왜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걸까 여전히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알고 지낸 많은 인기인들은 이미 본인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에게까지 관심이 미치지 않았고, 열심히 친해져봤자 금세 다른 친구를 찾아 떠나면서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 다반사라 나는 인기인과는 깊이있는 친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 큐레이터는 리버풀에서 끊임없이 본인이 아싸라고 주장했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전혀 아니었다. 큐레이터가 이렇게 인기인인 줄 알았다면 나는 그가 다가올 때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그 때까지 조용히 사무실에 앉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루종일 자판을 두드리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삶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느끼는 질투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공대생답게 과제와 공부량이 많았던 나는 큐레이터보다 일찍 영국으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과제를 하려고 일찍 온 거였는데 보람도 없이 남은 이스터 기간을 감기로 날려야 했다. 겨우 죽을 끓여서 먹고 잠들었다가 다시 죽을 먹고 잠드는 나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그 사이에 큐레이터도 돌아왔고, 약을 한번 갖다주기도 하고 몇번 연락을 하긴 했지만 뉴욕여행 전과 비교해서 연락 빈도가 훨씬 뜸해졌다. 아파서 뭘 할 기력이 없었던 탓에 나는 눈을 떴을 때 핸드폰만 들여다봤고,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큐레이터를 보며 역시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여행 다녀와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거면 애초에 친해지려고 하지 말지. 이래서 인기인들하고 친구하지 않으려는 거였는데. 몸이 아프니 마음은 더 아팠다.


내가 속상했던 건 단순히 연락 빈도가 줄어서는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기점이 뉴욕 여행이었고, 나는 여행 기간 큐레이터가 여행 전과는 태도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느꼈다. 즐거웠지만 미술관을 여러 군데 돌아다닌 탓에 하루 만 보는 가볍게 넘길 때가 많아 피곤한 여행이긴 했지만 뉴저지에서 뉴욕을 오가는 버스에 나란히 앉았을 때 왠지 큐레이터는 나에게 전처럼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릴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깨울 거라고 믿었던 건지 말없이 잠들 때가 많았고, 원래 불면증에 자주 시달리는 나는 혼자 창 밖을 바라보며 그 시간을 보냈다. 큐레이터가 깨어 있을 때도 피곤해 보여서 말을 걸기가 눈치가 보였다. 봄학기 내내 공부로 지쳐서 친구가 필요했던 나에게 그 버스 안에서의 시간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게 했다. 뉴욕에 가기 전에는 나에게 세심하게 신경써줬던 큐레이터이기에 때론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혹시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하기도 하고, 이제 나와는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내가 아픈 걸 아는데도 연락이 없다는 건 내가 진정 아웃오브안중이 됐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모종의 사건으로 연출자와 배우 중 선택의 기로에 놓인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미사키의 고향인 홋카이도로 데려가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때까지 가후쿠의 연극을 구경조차 않고 로봇마냥 운전하던 미사키는 무너져내린 자신의 집 앞에서 가후쿠를 안아주며 아내 오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용서해줄 수는 없겠냐고 묻는다. 가후쿠의 인생에 단 한번도 개입한 적이 없던 미사키가 처음으로 가후쿠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장면이 새하얀 홋카이도의 눈을 배경으로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그려진 점이 좋았다. 미사키는 연출자로 머물라고도, 배우가 되어 연기하라고도 하지 않고 그저 오토를 용서해달라고만 할 뿐이다. 미사키를 꼭 끌어안은 가후쿠는 그제서야 결단을 내리고 연극제로 돌아온다.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던 큐레이터는 런던에 일자리를 구하면서 런던에 방을 구한다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올렸고, 나는 잊어버리고 리버풀을 떠나려던 건가 싶어 결국 그에게 화를 내는 연락을 했다. 평소 화를 거의 내지 않고, 싸우느니 말없이 손절을 해버리는 나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거의 한 달이 넘게 지나서야 나는 큐레이터를 다시 만났다. 큐레이터는 그간 여러가지로 바빴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같이 밥을 먹고 석양을 보며 알버트 독을 산책하고, 한참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가후쿠와 미사키가 그랬던 것처럼 포옹을 했다. 가후쿠는 죽은 오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자신만의 지옥에서 빠져나왔는데, 나는 큐레이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이후에도 한동안 고민을 했다. 가후쿠가 오토를 용서하지 못했던 건 그만큼 오토를 사랑했기 때문일텐데, 내가 큐레이터에게 화가 났던 이유도 영국에서 만난 사람 중 마음을 연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큐레이터와 전처럼 지낸다는 건 인기인과는 친구하지 않는다는 나만의 철칙을 어기는 것이었고, 사람에게 마음을 다친 경험이 많은 내가 세운 철칙을 어겨도 내 마음이 앞으로 괜찮을까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큐레이터에게 변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과도 친구로 지내는 법을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르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심리학을 공부한 이래 지금까지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여본 적은 별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고통스러워서 심리학을 그만뒀는데, 큐레이터가 연락을 해오지 않는 동안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미사키가 말했듯 큐레이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도 큐레이터와 친구로 사는 삶에 익숙해져야겠지.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만나서 이야기한 후로는 전처럼 큐레이터와 잘 지내고 있다. 가후쿠의 삶을 구원하고 한국으로 사라진 미사키와는 달리 큐레이터는 아직 런던에서 근무 중이다. 운전하는 시간과 삶을 결코 포기하지 못했던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운전대를 내어준 것처럼, 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공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과정에 익숙해지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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