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콜

그냥 다 끝났으면 했어

by 레이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주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주말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몇 편씩 몰아보는 걸로 풀곤 했었다. 그렇게 몇년 하다보니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영화 시간표를 짜서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게 일상이 됐는데, 그렇게 몰아볼 때 봤던 영화 중 한 편이 <몬스터 콜>이었다. 리암 니슨이 목소리 출연하고, 펠리시티 존스가 출연하는데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생 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파이아키아 채널에서 슬픈 영화 목록 중 한 편에 포함시켰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주인공이 따돌림을 당하는 어린 소년이고 판타지 장르라 팀 버튼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기괴하다기보다는 따듯한 느낌이라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엄마는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아빠는 이혼 후 멀리 떠나서 잘 보러 오지도 않고, 할머니는 코너의 심정에 잘 공감해주지도 않고, 무엇보다 코너는 친구가 없다. 그런 코너를 어느 날 찾아온 건 괴물이다. 그리고 코너에게 매일 한 편씩 이야기를 들려준다. 괴물을 두려워하던 코너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괴물을 기다린다.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들을 법한 권선징악적인 동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 괴물은 코너의 진심을 듣길 원한다. 그리고 코너가 마지못해 내지른 진심은 그저 모든 게 끝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아픈 엄마를 보며 친구 하나 없는 일상을 매일 보내는 삶에 지친 코너는 엄마가 나을 거라는 희망을 버렸고, 아마도 자신이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코너는 그저 모든 게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희망사항에 죄책감을 느꼈기에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괴물은 코너에게 중요한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며 코너를 위로한다.


리버풀에서 모든 걸 내 손에 붙잡고 조율하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다. 특히 논문학기가 되었을 때 다니던 회사는 휴직 상태라 복직을 할 것인지 퇴직을 할 것인지, 휴직 연장은 가능한지 계속 회사와 협의를 해야 했고, 와중에 논문도 써야 했다. 거기다 영국에 남아있을 거라면 앞으로의 거취도 알아봐야 했다. 와중에 코벤트리에 다녀오면서 감기에 걸렸고, 리버풀로 기듯이 돌아와서는 며칠간 아무것도 못 했다. 그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거였다. 그냥 다 끝났으면 좋겠다고. 이제 다 그만두고 싶다고. 감기가 나으면 뭐해? 냄비받침이 될 예정인 논문도 써야 하고, 휴직 연장이 안되면 복직을 하든 퇴직을 하든 정해야 하고, 복직을 하면 돌아갈 (비싼) 비행기편을 알아봐야 하고, 퇴직을 하면 앞으로 먹고 살 고민을 해야 하고. 리버풀에 남아 있으면 주거비는 런던보다 덜 들겠지만 친구들도 거의 없고 논문쓰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는 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고, 런던으로 간다면 비싼 렌트비를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감당해야 하고 주거지를 알아보는 일도 까다로울 터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했고, 나대신 누가 다 정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매일 밤 쫓기는 꿈을 꿨고, 잠들었다가도 깨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는 매일 생각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내가 끝내고 싶은 건 유학생활이 아니었다. 매일 밤 눈을 감았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가 더 이상 뭔가를 해야 하는 세상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도 이쯤 한계가 있었는데, 누군가에게는 내가 유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배부른 고민을 하는 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몬스터 콜>의 원제는 <A Monster Calls>로, 의역하면 '괴물의 방문'이라는 뜻이다. 코너는 괴물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괴물을 기다렸고, 괴물이 나타나서는 많은 걸 부수기도 했다. 그리고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끝에 코너는 인간이 얼마나 복잡다단한 존재인지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코너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저 인간적인 감정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어린 코너가 그 사실을 벌써부터 깨우쳤다는 게 가슴아픈 일이지만 나를 위로해준 장면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를 찾아간 코너의 등 뒤에서 괴물이 코너의 엄마와 눈을 마주쳤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그러니까 그 괴물은 코너의 엄마로부터 코너에게 이어져 내려온 위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왜 하필 그 장면이 나에게 와닿았을까 스스로도 궁금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코너가 만난 괴물이 코너의 엄마를 알아보았다면 괴물이 가상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삶에 지친 주인공만이 볼 수 있는 신적인 존재를 보여주지만, 주인공이 상상한 존재라는 결말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비티>에서도 그랬고, <툴리>에서도 그랬다. 때로는 그 설정이 위로가 되기보다는 허무하곤 했었다. 자기 자신을 구하는 게 일종의 환각이라니. 하지만 코너를 구한 괴물은 코너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건 코너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걸 뜻했다. 어쩌면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코너의 엄마처럼 그림을 그렸었지만 포기했고, 코너처럼 친구가 없었고,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어른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휴직 연장이 겨우 결정되고 런던에 집을 구하고 나서 나는 사내 상담사와 심리검사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영상통화를 했다. 검사 결과 나는 높은 수준의 불안감과 우울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다만 그런 것에 비해 자가 방어 체제가 무너지지 않은 편이지만 상담에서마저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할 만큼 겉으로 보이는 정서 제어에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쓰이고 있을 거라고 상담사는 설명했다. 이 정도 점수가 나오는 사람이면 처음 만났을 때 티가 나게 마련인데 나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서 상담사도 놀랐다고. 그래서 지금 아마 논문 작업을 하는 게 대단히 힘들 거라고. 그리고 업무를 쉰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높은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도 했다. 아마 유학 직전까지 업무 처리를 한데다 사내 괴롭힘에 계속 시달렸고, 복직하면 같은 사람과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유령처럼 떠돌았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이니 내가 매일 아침 모든 게 끝나있길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이 영화의 너무나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진부한 성장영화 속에서도 단연 이 영화를 내가 추억하는 이유는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지막 신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마지막 장면이 주는 깊은 위로는 이 세상 어딘가에 내가 느끼는 걸 공유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 모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진 못하더라도, 내가 가진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코너를 위로한 괴물은 스크린을 건너 나에게도 따듯한 손길을 건네며 말했다. 모든 게 끝나길 바라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가면 된다고.


*<몬스터 콜>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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