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by 레이

아시아인 이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한 서사로, 그것도 B급 감성을 가진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는 건 일종의 사건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기 한참 전부터 영화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데 공개되는 스틸컷들은 B급 미쟝센이라 이 영화가 지독히도 궁금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극장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만났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영화의 내용을 잘 반영하면서도 눈길을 확 끄는 제목을 지을 수 있는건지, B급 미쟝센을 가지고 설득력있는 서사가 연출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레즈비언 딸을 지닌 이민자 1세대의 이야기가 한국에 사는 미혼 직장인 여성에게 와닿을 수 있는 건지.


이 영화가 주는 감동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건 멀티버스를 구하는 에블린이 모든 평행세계의 에블린 가운데 가장 실패한 에블린이라는 점이었다. 에블린은 쿵푸 마스터를 거쳐 유명한 배우가 될 수도 있었고, 요리사로 살 수도 있었고, 레즈비언 연인과 아이 없이 피아노를 치며 살 수도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에블린은 내린 선택마다 실패해 이혼을 목전에 두고 평생을 바쳐 이루어낸 세탁소마저 가압류될 위기에 처한 에블린이었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에블린에게 평행 세계의 웨이먼드는 그 에블린이 아무것도 아니기에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나는 그 최악의 에블린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성실하게 살아온 에블린일 거라고 생각했다. 에블린은 사랑하는 웨이먼드와 함께 하기 위해 가족을 두고 중국을 떠났고, 연고가 없는 미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야말로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지독하게 일을 해서 세탁소를 차릴 기초금을 장만했겠지. 세탁소를 차리던 날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춤을 추며 행복해하던 장면은 아주 잠시 스쳐지나가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에블린의 삶에서 몇 안되는 성공의 순간이 주었을 달콤함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3년여간의 취업 준비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내가 맞이했던 대기업 합격의 순간이 아주 비슷했을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세탁소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악의 에블린이 살아온 삶에서는 자신의 피땀으로 일궈낸 엄청난 성취였음에 분명하다.


공학 기초 수업으로 이루어졌던 1학기를 지나 2학기가 되어 나는 비로소 본격적인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를 마주했다. 1학기와 2학기의 갭은 너무나도 컸다. 개발자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 1학기 데이터 수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었고, 수학도 미적분을 제외하면 학창 시절에 이미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만 EBS를 들으며 쫓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처음 만나는 세계였고, 당연히 도움을 받을 인강도 자료도 없었다. 교과서가 있긴 하지만 한 권이 아니었고 일일이 읽어가며 수업을 따라갈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매 시간 인공지능 수업의 강의실에 앉아 나는 생각하곤 했다. 나만 멍청한가? 나만 못 알아듣나? 나만 어려운가? 수업마다 질문하는 학생이 꼭 있었는데, 나는 뭘 질문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저들은 이걸 다 이해하고 질문하는 걸까. 종종 동기들에게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고 하소연을 하곤 했는데, 동기들은 다 마찬가지라고 대답했지만 영혼없는 대답으로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설령 다들 비슷한 상황이라고 해서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다같이 50점 밑으로 점수를 받으면 다같이 구제되는 게 아니라 다같이 낙제하는 거니까.


개발자 교육을 받던 시절에도 사실 상황은 매한가지였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코드를 붙잡고 나는 매일밤 어떻게든 한 글자라도 코딩해 보려고 발악을 했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게 의미는 없다지만 문과 성향의 사람과 이과 성향의 사람은 분명히 나뉘어진다. 문과 성향을 가진 사람은 대체적으로 나무보다 숲을 보는 경향이 있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 그림을 보는 게 필수였다. 반면 이과 성향을 가진 사람은 숲보다 나무를 보는 경향이 있어 굳이 전체를 다 보지 않더라도 부분만을 가지고 업무를 처리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이걸 보통 건설에 비유하는데, 문과 공부가 골조를 세우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벽지를 바르고 가구를 갖다 놓는 식이라면 이과 공부는 일단 물이 필요하면 수도관을 연결하고 화장실이 필요하면 변기를 갖다 놓는 식이다. 그래서 이과생들은 당장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능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문제가 생기곤 했다. 반면 문과생들은 업무에 투입하기까지 긴 시간의 교육이 필요한 대신 업무의 전체 밑그림을 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업무를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문제는 공대 출신 개발자가 보기에 문과 출신 개발자가 대단히 답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체 구조를 보지 못하면 코드도 이해가 안됐다. 어느 날 셀장님이 왜 이렇게 업무를 어려워하냐고 묻자 저는 숲을 봐야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셀장님은 말씀하셨다. 이 부서 전체에 숲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누가 너한테 숲을 보여주냐고. 그건 그 나름대로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부서에서 아무도 장기적인 관점으로 업무에 접근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업무에서 내가 바보라는 생각은 매일 들었다. 다들 알아서 척척 업무를 해내는 것 같은데 나만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서가 전배되고 나서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주는 사수를 만나기 전까지 2년여간 나는 매일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리버풀에 와서 나는 심지어 돈을 내고 자존감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또 나만 모르나? 또 나만 바보인건가? 나는 머리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했던 건가? 공부를 하면서도 이 생각을 끊임없이 했고, 그렇다고 공부를 안할 순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녹화된 수업을 몇 번씩 돌려가며 공부를 했다. 리버풀 대학은 다행히도 녹화된 강의를 대부분 제공해줬기 때문에 설령 수업을 놓치거나 못 알아듣더라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씩 강의를 돌려보다 보면 역시 나는 바보라는 결론에 이를 뿐이었다.


구원자를 찾으러 온 평행 세계의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네가 모든 평행 우주에서 가장 실패한 에블린이라고 말해줬을 때 에블린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렇기에 뭐든지 될 수 있고, 네가 멀티버스를 구할 거라는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어쩌면 가장 실패했다는 에블린이 멀티버스를 구할 수 있었던 건 딸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는 근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의 손을 잡고 궁극의 베이글 너머로 가는 대신 딸 조이에게 소리친다. 나는 너의 엄마라고, 그러니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현대의 수많은 직장여성이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할 때, 에블린은 딸에게만은 엄마라고 부르도록 소리치며 호칭이 가진 강력한 힘을 이용한다. 이름이 가진 힘에 비해 호칭이 가지는 힘은 쉽게 간과된다. 나는 직장인이 되었을 때 개발자로 불리던 순간의 짜릿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리 역할에 만족해야 했던 여성들이 호칭도 직급도 없이 미스 땡으로 불릴 때 그들은 얼마나 땡대리, 땡과장이 되고 싶었을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단순히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개발자가 아닐 거라는 편견 하에 이름으로 불리며 비개발자 직군 취급을 당했던(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수치스러운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도 그 때 에블린처럼 외쳤어야 했을까. 나는 개발자라고, 그러니 이름으로 쉽게 부르지 말라고.


모두가 조부 투파키를 포기했을 때, 그래서 조부 투파키를 제거해야 한다고 외칠 때 에블린이 생각했던 건 의외로 단순했을지도 모른다. 궁극의 베이글 앞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조부 투파키라는 존재는 사실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야 할 딸 조이일 뿐이라고. 그리고 모든 걸 실패한 인생에서조차 마지막까지 세탁소 가압류를 막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조이를 구하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어쩌면 내가 그 힘들고 어려운 인공지능 과목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단순하게 생각해서였을지 모른다. 이제와서 그만둘 수는 없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해될 때까지 강의를 반복해서 듣고 외우는 것뿐이라고. 사실 모든 시험을 마친 지금도 내가 인공지능에 대해 대체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보다는 높은 점수로 인공지능 시험을 마무리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장면은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다정해 달라고 소리치는 장면이다. 결국 멀티버스를 구한 건 멀티버스의 에블린들이 준 어떤 힘이 아니라 조이에 대한 에블린의 사랑이었다. 웨이먼드의 말을 듣고서야 에블린은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 거라는 걸 깨달았고, 조이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다정함을 선사한다. 어느 순간 나는 개발자로서의 다정함을 잃었다. 내가 개발자가 되기 전 면접에서 했던, 스키너 박사처럼 사용자를 생각할 줄 아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결심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업무를 하다 보면 사용자의 편리성을 고려하기보다는 개발하기 쉽게 개발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 쉬웠다. 그럴 때마다 나의 사수는 나에게 사용자 편리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한마디씩 던져주곤 했다. 이렇게 개발하면 쓰는 사람이 불편하잖아. 나의 사수는 대단히 다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말을 할 때조차 화 한번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 번도 더 말해주곤 했다. 사수의 다정함은 힘든 직장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됐고, 덕분에 유학 결심이 늦춰진 것도 사실이다. 편지 쓰는 걸 좋아하다보니 유학생활 중에도 틈틈이 엽서와 편지를 썼는데, 받는 사람들이 반응이 좋을 때마다 나도 행복했다. 소소하지만 나의 다정함이 누군가의 세상을 바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웨이먼드를 떠올리며 문득 들었다.


멀티버스가 존재한다면, 나는 멀티버스에서 얼마나 실패한 나일까. 사실 실패라는 것도 기준이 다양하니 누군가의 삶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 내가 살면서 멀티버스를 구할 일은 없을테니 그저 지금의 나 자신을 구원하며 살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에블린처럼 수도 없이 실패를 경험했고, 농담삼아 문이과 예체능을 다 해봤음에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기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언젠가 인공지능이 모든 개발자를 대체하는 날이 오면 나만은 살아남아 다른 우주로 점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날까지 다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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