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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pr 05. 2021

서사 우려먹기의 유통기한

왜 조제는 계속 소환되는가

2004년작 일본 실사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인생영화로 꼽거나 좋아하는 멜로영화로 꼽는 관객은 많다. 2004년작이 개봉하고 한참 지나 재개봉했을 때 관람한 나는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충격을 먹었었는데 작년 개봉한 한국 리메이크작 <조제>와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제자리걸음이거나 혹은 후퇴했기 때문이다. 원작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끝내 조제와 츠네오의 선택이 이해가 되면서도 전동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조제를 보면서 약간의 희열을 느꼈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옮겨온 조제는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아가길 선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상 관객층의 연령이 낮아지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실사영화에 비해 서사가 단순해지고 희망적으로 변할 수밖에는 없겠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던 감성마저 소멸되며 장점보다 단점이 더 커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해서까지 조제는 지속적으로 스크린으로 소환되는 것일까. 영화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서사는 버전에 상관없이 츠네오가 아닌 조제가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다른 캐릭터들은 많은 변화를 거치는 데 반해서 조제는 어떤 버전에서든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조제가 가진 가장 큰 특성은 세상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장애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장애를 개인이 가진 특성이 아닌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2004년에는 조제의 까칠한 성격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조제를 이해의 대상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장애는 조금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아직까지 현대 사회는 장애인이 살기에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지만 장애인이 연민의 시선으로 볼 대상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거기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조제를 집 안에만 인질처럼 갇혀 있는 인물로 그리는 건 장애인에게 불합리하다. 더군다나 영화는 원작과는 달리 츠네오가 조제의 입장을 경험하도록 그리는데 이는 츠네오가 조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츠네오에 초점을 맞춘다. 츠네오가 조제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소한 것에도 신기함을 표현하는 조제의 모습을 장애인에 대한 감독의 진부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이미 17년 전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용감하게 세상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던 조제는 몇 안되는 취미였던 요리마저 츠네오가 계단을 만들어 주기 전까지는 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17년 전 원작에서 조제의 요리는 조제에게 잘 하는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나름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매개체이기도 했다. 장애인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산책조차 다니기 힘들지만 집 안만큼은 자신만의 세상으로 만든 조제의 부엌은 앉아서도 충분히 요리가 가능한 환경이었다. 특히 원작의 조제가 부엌의 의자에서 아무렇지 않게 쿵쿵 떨어지는 장면은 조제의 매력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한국 리메이크 버전으로 오면서는 조제의 요리 재능이 얼마간 지워져 아쉽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엌은 조제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온 조제는 츠네오가 좌식 계단을 만들어 주기 전까지는 부엌 근처도 가지 않는다. 조제의 재능이 미술로 옮겨가긴 했지만 관객에게 화려한 작화를 선보이는 것 이외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며 자신의 재능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대신 상처입은 츠네오를 위로하는 수단으로 변모한다. 자신의 세상을 구축하고 츠네오는 애정의 대상으로서만 기능하던 원작과는 달리 애니메이션작은 츠네오를 중심으로 모든 서사가 구동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시작에서는 츠네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마무리에서는 홀로 세상을 돌아다니던 원작과는 달리 애니메이션작은 불필요한 수미쌍관으로 서사를 마무리한다. 


애니메이션 리메이크작이 퇴보작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지는 조제의 모습이다. 할머니의 과보호로 집앞 산책조자 금지당한 조제는 츠네오를 관리인이라 부르며(사실 이 부분이 정말 손발 오글거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최대 단점이라고 생각함) 무릎꿇고 오래 버티기 등 말도 안되는 놀이를 시키다가 혼자서 집 바깥으로 나가다가 위험한 상황에까지 처한다. 츠네오의 도움으로 겨우 상황을 벗어나 멀리 외출하고 크레이프마저 처음 먹어보는 조제는 여성을 결국 한 사람의 인격으로 바라보는 대신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는 구시대적인 여성상을 반영한 것이다. 심지어 극중 츠네오보다도 나이가 많은 조제는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것조차 어려워하며 뒤떨어진 사회성을 자랑한다. 조제가 스크린으로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이유는 아마도 성인의 몸으로 법적인 연애가 가능하면서도 남성의 도움이 없이는 자립이 불가능한 남성 판타지의 현현일 공산이 크다. 물리적으로는 자립이 불가능하면서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츠네오를 위로하는 조제는 성인 여성에게 바라는 것이 결국은 정신적인 위로라는 이중성을 폭로하기도 한다(하나만 해라 하나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현대 일본 애니메이션 작화를 두고 현실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닌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린 것이라는 평을 하며 한탄한 적이 있다. 현실적인 배경을 두고 제작된 원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츠네오에게도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도박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당시 호황기의 거품이 꺼져가는 일본 사회를 츠네오 그 자체로 표현한 츠마부키 사토시는 조제에게 무작정 베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원작의 츠네오에게는 꿈도 없었고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갈 뿐인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이런 츠네오 또한 조제를 만나 한 단계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17년이 지나 작화로 되살아난 츠네오는 조제에게는 사치인 꿈을 가진 청년이다. 까칠하고 특이한 조제만큼이나 딱히 대단한 구석이 없었던 츠네오는 시간이 흘러 조제를 앞질러 혼자서만 성장한 상태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조제는 존재 자체로서 츠네오의 발목을 잡는 존재로 뒤쳐진다. 심지어 연상인 조제가 청소년기조차 진입하지 못한 것만 같은 존재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젠더 스와핑 영화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굳이 오래된 이야기를 더욱 더 후퇴한 버전으로 소환하는 이유는 결국 힐링을 빙자한 남성 판타지의 복원일 뿐이다. 더군다나 조제와 츠네오는 이미 오래 전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 바깥으로 나아갔다. 이제 조제를 다시 다다미방에 갇혀 구하러 와줄 왕자님을 기다리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로 만들 이유는 없다. 장르가 실사든 애니메이션이든 상관없다. 이제 조제는 조제라는 이름을 버리고 쿠미코로서 세상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조제에게도 츠네오에게도 정당하다.



*이미지 출처는 전부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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