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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27. 2021

문화가 빚어낸 악령의 한계

캔디맨은 소멸할 수 있을까

흑인,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특정되는 흑인이 아닌 관객이 <캔디맨>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캔디맨은 말하자면 영화 <블랙 팬서>의 악역이었던 킬몽거(마이클 B 조던 분)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다. 와칸다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미국에서 나고 자란 흑인 어머니를 둔 킬몽거는 전형적인 미국 흑인 발음을 구사하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뿌리를 와칸다가 아닌 미국으로 규정했다. 세상에 다양한 소수자가 있지만 미국을 비롯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착취했던 국가들의 흑인들은 사실 소수자 중에서도 특이 케이스다. 이들은 언어를 비롯한 문화를 잃어버렸고 조상과의 연결고리를 거의 갖지 못한다. 이들에게 연결된 가장 가까운 조상은 현재 국적인 국가로 끌려와 노예로 착취당했던 이들이다. 자신의 국가가 자신의 조상을 착취했었다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 흑인들의 애환을 다른 인종이 공유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계 흑인은 태생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억울함을 안고 태어나며 흑인이 등장하는 모든 매체에서 이는 지울 수 없는 표식이 된다. 흑인이 소수자성을 배제한 채 온전히 등장하는 방법은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곳이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다. <캔디맨>의 제작자이기도 한 조던 필은 <어스>를 만들면서 흑인이 주인공이면 반드시 흑인에 관한 이야기여야 하냐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지만 <어스> 내에 흑인의 소수자성이 온전히 지워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인 산드라 오는 오스카 시상대에 오른 봉준호 감독을 보며 여태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며 언제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야 했던 자신과는 달리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 자신이 언제나 주류에 속해 있어 오스카 시상식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내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명문대를 졸업한 남성인 봉준호 감독이 한국 영화계 내에서 자신의 출신으로 인해 차별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아시아계 소수자는 서구 사회에서는 이방인일지언정 동양 출신의 동양인으로서는 아직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아시아계 뮤지션은 거의 없지만 한국에서 프로듀싱해 발판을 마련한 BTS는 세계적인 현상에 가깝다. 하지만 흑인은 다르다.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아프리카계가 문화에서 돌풍을 일으킨 적은 없다. 거기다 아시아계 국가들이 성장한 GDP를 기반으로 어느 정도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데 반해 아직까지 아프리카 국가들은 제 3세계에 머문다. 흑인들은 산드라 오가 봉준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이들에게 주어진 문화적인 배경은 노예로 살아야 했던 조상들의 시간부터 시작된다.



캔디맨은 이런 문화적인 배경에서 탄생한 악령이다. 공포영화가 날이 갈수록 맥을 못 추고 있는 한국에서조차 원한을 가진 악령은 최소한 조선시대로 회귀하는 처녀귀신에서 시작된다. 처녀귀신들은 개인적인 원한이 풀어지면 모습을 감추지만 캔디맨은 세탁소 주인인 버크(콜맨 도밍고 분)가 말하듯 한 사람이 아니라 흑인의 애환을 모아놓은 벌집에 가깝기에 한 개인의 억울함이 풀어진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오랜 시간 차별당하며 살아온 흑인 사회의 억울함이 한두 개의 사건 해결로 씻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캔디맨은 흑인사회 그 자체이기에 미국 내 흑인사회가 온전히 없어지거나 흑인이 백인을 넘어서는 계급으로 이동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안소니(야히아 압둘 마틴 2세)는 예술 작품을 만들면서 캔디맨을 활용하기로 마음먹는데 이 순간 사실상 이미 안소니는 캔디맨에게 사로잡힌 신세다. 너의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고 싶다는 미술관 주인의 말은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흑인사회의 현재와 과거를 집합한 총체일 수밖에 없는 캔디맨은 흑인 사회의 미래가 될 수 없는 존재다. 흑인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려면 과거의 억울함에 갇혀 있는 대신 한 발짝 나아가야 하는데 캔디맨은 그럴 수 없다. 안소니가 캔디맨을 예술의 소재로 선택한 순간 안소니는 벌에 쏘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캔디맨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이 든다. 특히 백인에게 차별당한 흑인의 억울함을 상징하는 것 같은 존재인 캔디맨은 백인만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외운 모든 이들을 처벌한다. 캔디맨의 희생자는 주로 장난삼아 그 이름을 부른 백인들이지만 흑인 희생자도 존재한다. 특히 학교에서 화장실 거울을 보며 캔디맨을 소환한 소녀들이 무자비하게 살육당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굳이 백인 소녀들이 흑인 소녀를 괴롭히는 장면을 앞뒤로 배치한다. 괴롭힘당하는 흑인 소녀가 흑인이기에 피해자가 된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관객은 알 수 없으며 캔디맨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캔디맨의 희생자가 흑인 소녀를 괴롭히는 백인 소녀들인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 원인이 아니다. 캔디맨은 정의의 사도와 억울함을 주장하는 피해자 사이를 왔다갔다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캔디맨의 과거를 파헤치며 자신이 캔디맨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안소니는 자신을 구하려고 한 이는 백인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반면 자신을 캔디맨과 다시 이어붙인 것은 (영화에서 정확히 누구라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대충 짐작은 가는) 흑인 중 한명이다.



어린 안소니를 구한 것이 백인이라는 점은 몇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캔디맨이 흑인 사회의 억울함에서 탄생했지만 악령이라는 점에서 양면적인 모습을 지니는 만큼 안소니를 구한 백인도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표면적으로 어린 아이를 잔혹한 운명에서 구한 어른인 동시에 흑인을 차별하던 백인 조상을 가진 이가 하는 속죄라는 점이다. 하고많은 문화적인 현상 가운데 굳이 흑인 문화의 산물인 캔디맨을 조사해 알려고 했던 이 백인 여성은 캔디맨이 흑인 사회를 보호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제물로 삼아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될 뻔한 아기를 구함으로써 일말의 속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캔디맨은 말했듯이 흑인 사회를 보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캔디맨을 소환하는 이가 지켜보는 살육의 현장은 캔디맨이 확연히 흑인 사회가 낳은 수호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제물이 될 뻔한 안소니를 구한다는 것은 이런 캔디맨의 종속을 저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흑인을 차별한 역사를 반성하는 백인들은 이제 그들이 앙심을 거두고 한 사회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만 청산되지 않은 역사가 있는 한, 그리고 아직까지 반성하지 않는 백인이 존재하는 한 캔디맨은 누군가를 제물삼아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안소니는 캔디맨의 희생자인가, 캔디맨의 유지를 받드는 상속자인가. 예술가로서의 안소니 개인의 삶이 지속적으로 스크린에 비춰지는 한 관객은 안소니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안소니가 캔디맨의 제물이 된 것은 모종의 음모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중반부를 지나 후반부에 접어들면 안소니는 점점 자신을 잃고 멍하게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안소니라는 개인은 사라지고 신체에 형상화된 벌집처럼 거대한 흑인 사회 그 자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흑인 사회에 대한 안타까운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인종을 떠나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은 이들은 배제되고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강요되는 흑인 사회는 캔디맨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차별당한 소수자로서의 역사를 청산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흑인이 존재하려면 가상의 국가 와칸다로 소속을 옮겨야 한다. 



매체에서 보기 힘든 흑인 예술가의 삶은 그래서 <캔디맨>을 통해 더욱 안타까움을 더한다. 운동선수(특히 농구) 혹은 랩퍼 말고는 유명인을 유독 보기 힘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자신을 지우더라도 서로를 결속하며 살아가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한 건지도 모른다. <캔디맨>은 이런 흑인 사회를 향한 흑인 여성 감독의 연서인 동시에 자기연민으로 읽힌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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