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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blie Mar 26. 2021

아이의 인간관계, 엄마의 역할은?

아이의 영국 학교 적응기(6)

 학교에 레터를 쓸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더라도 자잘하게 고민되고 애를 써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친구에 대한 선택 폭도 넓고 대부분 아파트에 사니 한 동네에 친구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주택가가 대부분인 영국에서는 동네 친구 사귀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학교에서 마음 맞는 친구가 생겨야 학교를 즐겁게 다닐 테고 하교 후에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기길 바랐었다. 학교에서 친구야 아이가 할 몫이지만, 방과 후까지 친구가 되려면 엄마의 역할이 필요했다. 공교육이 시작되는 리셉션 때는 영국 엄마들도 아이들의 교우관계를 위해 반 아이들을 모두 초대하는 공개 생일 파티도 많이 해서 알건 모르건 초대받아 가서 친구가 될 기회가 많다고 하는데, 1학년이 끝날 때쯤 합류한 우리는 남들이 받는다는 생일 파티 초대나 플레이 데이트 초대 소식도 들려오질 않았다. '초대, 받을 수 없다면 초대해야지 뭐.'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지난번 하교 시간에 "Hi"하고 인사했던 레이시 엄마가 동생 유모차를 밀며 열심히 앞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명랑함을 오버 탑재하고 말을 걸었다. "레시이 엄마죠? 레이시 너무 착하고 친절해요. 우리 딸 옆에 앉아서 늘 칭찬해주고 다시 말해주고, 도와주는 천사 같은 아이예요. 정말 고맙더라구요~" 이런 말에 기쁘지 않을 엄마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엔 '착하다고?'라는 표정도 함께 있었다. 그렇게 그날 그녀의 번호를 땄고, 5분이 안 되는 길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아이들이 나오기까지 무슨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막막했고, 우리 딸보다 먼저 보이는 레이시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저기 레이시 나오네요~! 잘 가요, 내일 봐요~" 아, 이제 이 대화가 끝나는구나...

 레이시 엄마는 레이시를 알고 있었다. 레이시는 마냥 순하게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2년 가까이 지내며 지켜보니 Bossy한 성향이라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온순한 아이들을 주로 지배(?)하며 친구로 지냈다. 잠자리에 누워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이가, "레이시가 사과를 다 먹고 버려달라고 해서 버려줬어."라고 했을 땐, 나를 다스릴 침착함과 엄마로서의 순발력이 필요했다. 일단 아이가 눈치채도록 놀라거나 속상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단은 이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인지, 우리 아이에게만 그러는 것인지 파악해야 했다. 동시에 아이가 엄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도록도 해야 했다. 은밀한 수사 결과, 레이시는 우리 아이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 아이도 매일 그렇게 부려 먹히는 개념으로 쓰레기를 버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자기가 해주고 싶을 때는 해주고 싫을 때는 싫다고 한다고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꼭 한마디는 해주고 싶었다. "친구는 위-아래 관계가 되면 친구가 되지 못해. 위에 있는 친구도 아래 있는 친구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시시하게 생각하지. 그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동등해져야 해. 네가 싫은데도 시키는 대로 해주기만 한다면 걔는 널 친구로 생각하지 않게 될 거야. 네가 싫을 때는 No라고 해야 해"라고 하며 그날 밤은 끝이 났다.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부당한 부탁을 받은 것 같았지만, 아이의 마음에 맡겨두기로 했다. 나중에 어떤 대화 중에 아이는 그날 밤 침대에서 해줬던 이야기를 마음에 잘 담아두었던지 다시 꺼내어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 이후로 귀국한 지금까지도 레이시는 친구로 남아있으니 우린 서로 잘 지낸 것이리라.

 그날 밤 엄마의 마음 한 켠에는 아이들이 조금 더 나이가 있었다면 인종차별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는 찝찝함도 있었다. 그럴  주먹부터 나가듯 마음부터 나가면 정말 힘들어진다. 작은  하나하나  인종차별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또한 약자라는  증명하는 자격지심일  있다는 스스로의 자존심도 함께 발현되었던  같다. 아직 한국 나이 7세, 만 5세 정도의 아이들이었으니 그런 종류의 구별이 없고 성향이 맞으면 친구가 되고 아니면 아닌, 인종차별이라는 말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나이들이었다. 아이는 귀국 후, Black Lives Matter가 생겼을 때도 무슨 일인지 사실을 알 수는 있어도 지내면서 겪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공감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그 외에도 놀이터 뺑뺑이를 돌려준 달지,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섞였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렇다. 친하든 멀든 나이가 많든 적든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쪽으로 사회생활을 한다. 신세지는 걸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부모에 그 자식인지도 모르겠다. 바라보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덕분에 트러블을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아이는 시소도 밀어주고, 뺑뺑이도 돌려주며 아이들과 어울렸다. 너의 방식인 걸 내가 어쩌겠니...

 다음 편엔, ‘초대, 받지 못하면 보내지’라며 RSVP를 보냈던 “초대”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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