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 외국다녀오면 한국에서 하는 것보다 영어 다 잘할까?
여기 다니는 애들 다들 살다 왔어요,
미국에서 4년도 살다오고 해도 말만 유창하지 라이팅이나 문법, 어휘력은 안 좋은 경우도 많죠.
모 대치동 프랜차이즈 영어학원에서 레벨테스트를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영어를 잘한다고 하길래, 영국에서 2년을 살았는데, 영국에서도 사립학교에 다닌 아이들이나 오래 산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이 정도 하는 게 썩 내세울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머쓱해서 "런던에서 2년을 살았어요."라고 했더니 돌아왔던 대답이었다. 어릴 때 해외에서 2년에서 4년을 살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실력을 갖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한국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
뉴질랜드,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알음알음 리터니들(귀국자녀)을 알게 되었고 리터니들도 다양한 환경에 놓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어가 그 나라의 공용어인지에서도 차이가 생겼고, 같은 반에 한국인이 얼마나 있는 지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도 좋다는 사립학교에는 한국 주재원 자녀들이 한반에 5~8명도 된다고 했다.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국제학교를 다니는 경우는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 트리링규얼이 된다는 엄청난 매력이 있었다. 다시 간다면 영문권이 아닌 나라에 가서 트리링규얼을 선택할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영어가 느는 속도는 영어가 국어거나 영어가 공용어인 나라에서 사는 것과는 차이가 생기는 것 같았다. 언어는 생활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는 아니라도 공용어인 나라의 아이들은 영어를 더 잘하기가 쉬웠다.
사실, 한국 영어를 잘하는 건 외국 영어를 잘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게 요즈음 생각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착실하게 영어를 공부해온 아이들이 한국 환경에서의 영어는 더 탄탄할 수도 있다 싶다. 우리 아이도 한국 영어 기준에서의 구멍이 있다. 단적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열심히 한 아이와 영문권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힌 아이는 사이에는 쌓여있는 어휘의 영역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외국살이 한 아이의 어휘가 부분집합처럼 한국 아이의 어휘를 포괄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영국 학교에서는 아이의 리딩을 선생님들이 주기적으로 테스트하고 아이가 잘 읽으면 숙제로 읽을 책의 북밴드를 바꿔서 보내준다. 아이는 핑크 북밴드, 그러니까 렉사일 점수조차 나오지 않는 낮은 레벨에서 시작해서 1년 반 뒤 만 8세에 귀국할 때는 14레벨, 평균 만 10세의 리딩 수준인 렉사일 700대 책을 학교에서 보내주게 되었다. 그즈음 레벨이 되면 영국에서는 Free Leader라고 칭하며 더 이상 선생님들이 레벨을 테스트해서 책을 주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책을 도서관에서 가져가도록 하는 학교들이 많다. 지금은, 취향을 많이 타는 아이라 책의 장르에 따라 다르지만 레벨 16~18 사이의 책을 보는 데 무리는 없다.
ORT의 경우는 단순하게 책의 두께나 글씨의 크기만 갖고 나눠진다기보다는 문장 구사 수준이나, 책이 담고 있는 지식과 연령의 상관관계도 고려해서 나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예로, 레벨이 바뀌어 책을 들고 왔을 때 글밥이나 글씨 크기는 같은데도, 문법적으로 부사 도치 구문이 나온 달 지 문장의 구사력이 달라졌다. 유색인종의 인권이나, 여성 인권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레벨 11 정도에서 나왔었다.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을 글밥이나 글자의 크기로 판단하지 말고, 아이가 얼마큼의 지식을 영어로 쌓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영어는 사고력과 배경지식이 자라며 함께 자란다는 것을 귀국 1년이 넘으며 느낄 수 있다. 한국에 가면 빛의 속도로 영어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옛말이라고들 한다. 옛날에는 뒷받침해줄 컨텐츠와 교육이 부족한 시절이었기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 돌아와서, 흔히 보내는 Big3 영어 학원 같은 곳에 보내지 않을 뿐더러 영국문화원 정도를 다니고 있다. 영국에 남아 있는 지인들은 아이의 영어가 줄었는지 참 궁금해한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어떤 면에서는 줄고 어떤 면에서는 늘었다."라고. 아직 혼자 놀 때는 영어로 역할 놀이를 한다. 하지만 평소 집에서 영어로 이야기하던 버릇은 없어졌고, 모르던 단어의 스펠링도 척척 써내던 아이가 알던 단어의 스펠링을 틀리기도 한다. 하지만, 엊그제는 귀국 직후에는 권해줘도 읽지 않던 책을 재밌다며 들고 나왔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고 어려운 단어도 없어 보였는데 그때는 읽기 싫어해서 의야해했었다. 아이에게 들어보면, 그 이유는 사고와 지식 그리고 감정의 성숙 덕에 책을 이해할 수 있고 빠져들게 되는 것 같아 보인다. 잠수네 영어 말이 맞는 것 같다. 영어 기술에만 치우치면 어느 순간 영어가 느는 데 한계가 생기고, 한글 책으로 지식과 이해력을 길러두어야 영어도 늘 수 있으니, 어느 언어든 주 언어의 문해력과 사고력을 키워놓는 것이 좋다는 그 말!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아이들이라고 영어가 마치 물마시듯 느는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영어 고강도 환경에 처해지기때문에 그만큼의 고통을 겪으며 영어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영어를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있었다.
이제 영국 가기 전, 렉사일 점수도 나오지 않았다는 아이의 영어 수준은 어땠고, 어떻게 해서, 이만큼 변했는지 알아보자.
아이는 영어를 못했다. 전혀 못했다고 해도 되겠다. 유치원에 다니며 스펠링을 알게 된 정도였다. 영어 유치원을 다니거나 해서 영어로 듣고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영국에 가기로 결정이 됐을 때서야 "어이쿠, 큰 일났다!" 싶었다. 그 즈음부터 동네 교회의 문화센터에서 챈트(리듬과 운율이 있는 노래) 방식으로 ORT책을 따라 읽는 -아니, 의미 모르고 '따라 부르는'이라는 표현이 썩 적절하겠다- 수업을 일주일에 한번 정도 영어와 친해지라는 의미에서 보냈다. 그리고 출국 전까지 석달 간, 알파블록스라는 Cbeebies(BBC의 어린이 방송)의 파닉스 학습 동영상을 하루에 15분 정도씩 석달쯤 보여주었다. 알파블록스는 각 음소의 캐릭터들이 나와 자신의 소리를 알려주고 음소 캐릭터들끼리 불꽃튀듯 만나 음운의 소리 만들어내 알려주는 방식이다. 아이는 그 동영상이 그렇게 재밌었는지 15분만 보는 걸 아쉬워했었다.
그냥 영상의 재미만 보고 학습효과는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영국에서의 등교가 시작되기 전에 자연사박물관에 놀러갔던 어느 날, 혹시나 하고 읽을 수 있냐고 물으니 Tyrannosaurus를 더듬더듬 읽어내곤 또 다른 공룡을 보러 휙~가버렸다.
알파블록스는 마법이구나?
그 외에 따로 영어 공부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니, 학교에 가서 '난 영어 못해'라는 말을 I am not English라고 했지. 그저 모든 것을 Be동사로 처리하던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학교에 갔을 때는 만5세 Year1 세 학기 중 마지막 학기였다. 아이들은 기본적인 파닉스는 끝이 난 상태였지만 다수의 아이들이 아직은 책을 줄줄 읽는 정도는 아니고 떠듬떠듬 읽었다. 그래서 부모가 모두 영국 네이티브인 아이들도 ORT기준으로 Red 정도의 책을 읽었고, 우리 아이도 학교에서 Pink로 시작한 책을 며칠만에 Red 책으로 바꾸어 보내주었다. 물론, 한 학년 정도 읽기 레벨이 높은 아이들도 있었다.
엄마인지라 마음이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학습을 떠나서, 아이가 학교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친구도 생겨서 즐거워지길 바라는 이유에서, 읽기나 쓰기보다도 듣고 말하기가 빨리 나아졌으면 했다. 어떤 엄마는 Nanny를 하루에 2-3시간 대학생으로 고용해서 아이의 영어를 늘려주었고 효과가 좋았다며, “애 길게 힘들게 하지마”라며 독촉하였다. Nanny는 우리로 치면 낮시간에 아이를 봐주는 베이비시터인데, 영국에서는 밤중에 아이를 봐주는 것을 Baby sitter라고 한다. 알아보다보니, 그 외에도 1:1로 Nanny보다 교육적으로 아이를 돌봐주는 Childminder도 있어서 그 협회에서 적당한 선생님이 있는지 검색해보기도 했다. Baby Sitter, Nanny와 Childminder 중에 교육을 수료한 건 Childminder였고 세 종류 모두 영국의 교육 평가 기관인 Ofsted에 등록되어 있어서 선생님에 대한 평가 이력을 확인해볼 수도 있다. 또 영어가 부족한 어른이나 아이를 대상으로 무료로 방문수업을 해주는 Charity단체도 알아보긴 했었다. 직장에서의 적응하느라 내 코도 석자인 지라 알아만 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는 남는 방이 있었으니, 숙식을 함께 하며 아이를 봐주는 Au pair를 구해도 좋았을 뻔 했다. 주로 유럽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하는데 독일 친구들이 꽤 많았고 프랑스 친구들도 있었다. 독일인들은 독일어가 영어와 어원이 같아서 영어를 정말 잘한다. 다만, 같은 단어가 많아서 영어단어를 독일식으로 발음해버리는 문제가 있다. 여튼, 그땐 그런 것을 몰랐다. 결국, 그렇게 고민만 하다 시간은 흘렀고 어느 순간 그럴 필요가 쉽게 없어졌다.
아마, 아이가 들은 것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파닉스를 적용해서 '소리나는대로 다 틀리게'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가고, 틀린 문법으로 신데렐라 이야기를 지어하던 게 학교를 가고 2개월쯤 되었을 때 였던 것 같다. 그 사이 2주간의 이스터 방학도 있었으니 실제로는 1개월 반이었다. 8:45 to 3:15, 6시간 반 영어 노출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만 5세반 아이의 언어 흡수력은 괴물에 가까웠다.
와... 어떻게 영어를 이렇게 멋대로 소리나는대로 쓰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시에 물어보고 밑에다가 무슨 고전문학 공부할 때처럼 해석본을 썼다. 한국에서 파닉스 파닉스 난리일 때, 파닉스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이걸 보면 원어민 아이들은 이미 아는 언어와 소리를 글자를 만드는 소리 원리를 배워서 옮겨적으면 되니까 완전 의미있겠구나 싶었다.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아이의 영어를 키운 네 가지를 이야기해보자.
학교에서는 처음 들어온 우리 아이를 학습 우열의 맨 아래 그룹에 넣었다. 한달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아래 학년이었을 터였는데, 맨 아래 그룹이면 어떠하랴. 그 맨 아래 그룹은 보조 선생님이 붙어서 집중 케어를 했다. 잘하는 그룹은 스스로 학습이 가능하기에 케어를 상대적으로 덜하고, 그 그룹의 아이들끼리 서로 보면서 학습이 진작되도록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을 위해, 학교 시간 내에 별도의 시간을 내어 한 번씩 아이에게 책 읽는 것을 봐주었다.
처음에는 4개 그룹 중 맨 아래 그룹에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관리 덕에 차근차근 올라가 2학년 중반에는 최고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영국인에게 영국의 우열그룹 방식의 교육이 너무 도움이 되었다고, 한국이었다면 개인별 케어없이 단체 교육을 하기 때문에 못하는 아이는 계속 못했을 것이라고, 차근차근 아이의 능력을 키워줘서 좋았다고 하니,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영원한 열등 그룹은 영원한 열등 그룹이라며, 특별한 케이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인 즉, 한국에서 간 아이들은 이 시스템을 잘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양인들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타고나고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고, 우열을 나누는 이유도 각자의 능력 안에서 성취도를 높게 한다는 것에 취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도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이 학구열도 높고 평균적으로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뿐더러, 아이를 보면 언어만 못하는 것인지 공부 능력이 떨어지는 것인지를 아닌 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언어를 못한다고 영원히 열등 그룹에 두지 않는 것이다. 언어만 못하는 우리네들은 특별 케어를 받아 빠르게 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학부모 상담을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은 '집에서 잘 서포트해주어서'라고 했지만, '집에서는 한 게 없는데 학교에서 애를 다 키웠는데'라고 생각했다.
다른 엄마들은 영국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영어캠프를 보내거나, 한인이 운영하는 영어학원을 찾아 보냈다. 그런 게 있는 것조차도 나중에 안 엄마니까 한심하다. 그저 해줬던 것은 학교에서 읽으라고 매일 보내주는 책을 꼼꼼하게 읽어 보냈다. (읽혀 보냈다고 하지 않는 것은, 아이 책을 거의 다 같이 읽었고 덕분에 나도 언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성장했다.) 원래는 매일 책을 읽어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인데, 의미는 둘째치고 소리 내 읽는 것이 서툴 때는, 읽는 것이 어느 정도 수월해질 때까지 책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처음 1+레벨인 Red 밴드의 책을 돌려보내는 데는 하루 이삼십분씩 읽어 이삼일이 걸렸었다. 저 위에 책에 Rat을 "ㄹ-아-ㅅ"하고 읽는 것이 "ㄹ앗"이 될 정도는 해서 보냈다. 물어보니, 당시 영국인 레이시도 그렇게 더듬더듬 읽는다고 했다.
3-4 레벨이 되었을 때는 읽는 것이 어느 정도 수월해졌던 것 같고, 하루에 한 권을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즈음부터는 책의 내용을 아는지 간단하게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레벨 8이 되었을 때는 과학, 사회, 역사, 요리 등의 내용이 나오며 책의 내용이 어지간히 복잡해졌는데 읽고 머릿속에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하였다. 우주에 대한 내용이 나왔을 때는 각 행성의 특징을 표로 같이 만들어보았다. 요리에 대한 책은 소꿉장난으로 레시피를 익혀서 따라 하는 놀이를 했다. 4~8 사이 레벨을 지나오는 동안은 모르는 단어의 뜻을 한번 알려주고 포스트잇에 한번 써보고 벽에 붙여놓는 정도의 단어 체크를 했다. 그 포스트잇을 다시 보며 익히거나 외우게 하지는 않았다.
레벨 8이 되었을 때 한번 큰 변혁의 단계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딱히 책 읽는 법에 대한 가이드를 주지 않았던 학교도 레벨 8이 되었을 때는, 책을 읽을 때 이렇게 하라며 리딩 리코드 노트에 메모를 하나 붙여 보냈다.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 하루에 한 권 책을 읽혀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책을 이틀에 나눠 읽혀 보냈다. 그 얇은 책 반권을 읽는데도 40분이 걸렸다. 단지 영어와의 싸움이 아니라 8세 아이를 40분 집중해서 앉아 있도록 하는 전쟁을 벌인 것에 가까웠다. 소리 내서 읽도록 했고, 페이지마다 간단하게 지문에서 찾아서 대답할 수 있는 퀴즈를 냈다.
재밌게도 그전까지는 아이가 생활에서 영어를 익혀서 그런지, 아이들이 쓰는 의태어나 동작과 관련된 단어들은 아이가 더 잘 아는 것이 상당히 있어서 곤혹스러운 적이 많았는데, 레벨 8이 되면서 드디어 역전되어 내가 아는 척하기가 좋아졌다. 아기들 단어도 모르는 스스로를 보며 "아, 이게 수험영어의 한계구나."싶기도 했다. 이 말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의미가 있는데, 외국에서 영어를 어릴 때 배웠다고 해도 탄탄히 다져가며 익히지 않고 꾸준히 성장시키지 않으면, 아기 영어일 뿐일 수 있고 학습 영어랑은 또 별개라는 뜻이다. 렉사일 점수로는 300이 그 경계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레벨 10이 되었을 때는 학교에서 보내온 리딩 가이드에 따르면, 더 이상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되고, 레벨 11이 되었을 때는 하루에 한 권을 읽혀 돌려보내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티타임 전에 책을 좀 읽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책을 또 더 읽으라고 친절하게 가이드를 주었다. 레벨 13이 되었을 때는, 소설책들은 먼저 읽고 체크하기 싫을 만큼 길어졌고 내용도 꼬임이 있었다. 아이는 그맘때쯤엔 나보다 빨리 후루룩 책을 읽어 재끼고 나와 내용에 대해서 논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소설의 트위스트 된 구성 상 플롯이나 상황 전개를 틀리게 이해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나도 읽고 녀석을 바로잡기 위해 녀석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이내 그 두께의 책을 매일 읽어 아이와 싸우는 것을 포기했다. 이젠 그냥 너에게 맡겨 두마...
1년이 지났을 무렵, 유명했던 영국 엄마들 네이버 카페에 한 글이 올라왔다. 아이가 도무지 영어가 늘지 않는다는 글이었다. 그 글에 지난 시간 학교에서 보내온 책을 같이 읽고 모르는 단어를 한번 짚어주는 정도로 해주면 금방 느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댓글을 달았었다. 원글 작성자는, 지금까지 아이에게 맡겨두었고, 읽었다고 하면 사인해서 돌려보냈는데, 이제 같이 읽어야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 댓글을 보며, 아이가 1년이 지나며 연령 평균 독서 레벨을 뛰어넘고, Young Writers에 글이 뽑혀 책에 실리게 된 것도 학교에서 보내준 책을 충실히 읽은 덕이구나 싶었다.
6개월여 만에 영어를 조금 할 법하니 다가온 겨울 방학.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치는 영국의 겨울 타향살이에 무언가를 더 할 수도 없었다.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아이는 일주일에 두어 번쯤 시간 때우기용의 Craft 수업이나 하나 다녀오고 할머니와 집에 있었다. 4시면 해가 지는 영국의 지친 오후가 -아니 이미 긴 밤이라고 해두자- 되면 허리띠 풀어놓고 TV를 보았다. 아이 영어를 키운 팔 할은 BBC의 어린이 채널 Cbeebies라고 어딜 가나 농담을 하고 다녔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겨울 방학이 지나자, 영어가 유창해졌다. 뇌는 배운 것을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다더니 학교생활 8개월 간, 각종 방학들을 빼면 6개월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배운 것을 소화시키는 시간을 가져서 놀고 또 놀기만 한 겨울방학이 지나니, 영어가 이제 불편 없이 제대로 붙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온 것이었을까? Cbeebies 방송은 정말 유익하기 그지없다. 픽션 애니메이션들도 심심할 정도로 건전하기 짝이 없지만 아기 영어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릴 수 있는 생활 영어들이 그득했고, 과학이나 세계 탐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그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학교에서는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를 수업 시간에 했었고, 아이는 학교 책장에서 지금까지의 최애 책인 Matilda를 간혹 들춰 봤다고 했다. "이때다!"며 Roal Dahl 씨 책을 저렴하게 묶어 파는 세트를 주문했고, 안 좋은 영어 발음으로 Matilda를 매일 밤 조금씩 읽어주었다. 아이는 Matilda책에서 Matilda가 읽는 책들을 궁금해했다. 소년소녀 명작부터 디킨스 소설까지 섭렵하는 마틸다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마틸다가 읽었던 책 중에 아이가 관심 있어하는 책을 연령에 맞는 쉬운 책으로 사서 영문과 국문책 모두 읽어주는 정도가 겨울 방학 동안 칩거하며 밤마다 했던 일이었다.
언어는 기술이 아니라 축적된 종합적 문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단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영국 아이들이 소소하게 하는 활동들을 조금씩 다양하게 하는 것을 추구했다. 많은 주재원들처럼 넉넉한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어서, 고급 악기나 스포츠, 비싼 영어 과외를 시키지는 못했다. 주재원들의 생활은 영국에서도 영국의 서민층이 누릴 수 없는 호화스러운 생활에 가깝다. 가능한 몇 파운드면 들을 수 있는 수업, 학교의 특별활동, 영국의 기념일에 무료로 만들어지는 이벤트에 참석하며 상황과 언어, 문화를 겪으려고 노력했다.
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요가를 들었고, 점심시간에 중에 특별활동으로 할 수 있는 피아노 수업을 20분 정도 신청했었다. 주말에는 구립 수영장에서 30분이면 끝나는 수영 수업을 했고, 어떤 텀에는 어린이 도자기 수업을 들었다. 방학이면 동네 구립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저렴하게 크라프트, 쿠킹, 짐네스틱이나 트램펄린 수업을 일이주쯤 들었다. 짐네스틱은 아이들 사이에 너무 인기가 있어서 대기를 1년 이상 걸어야 한다고 해서 방학 때나 잠시 들을 수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축구 클럽을 가지 않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였고 여자 아이들도 가끔 있었지만, 절대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시도도 할 수 없었다. 테니스가 흔한 운동인 영국이라서 방과 후 수업에도 있었고 동네에서도 쉽게 테니스를 배울 수 있었지만 그 역시 아이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해서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테니스로 유명한 그 윔블던이 바로 근처 건만. 그나마 집에서 승마장이 내려다 보이던 터라, 비싸서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승마를 통해 단순하지만 그럴 때는 어떤 언어를 쓰는지 배우기도 했다.
영국은 아이들 필독서를 작은 아이들 뮤지컬로 만들어 놓은 것이 많았다. 때가 되면 동네 극장에 그런 뮤지컬이 걸리곤 하는데, 뮤지컬을 보고 나면 책과 캐릭터 인형을 팔기도 하고 해서 그 책이나 시리즈에 애착을 갖게 하기 좋았다. 런던에 지내는 동안 동네 Rose Theatre에 Roal Dalh 씨의 George's Marvellous Madicine, 언어의 라임을 이용한 책 Oi Frog, 헨델과 그레텔, 영국의 유명 동화작가 줄리아 도널슨의 The Gruffalo Child를 보았다. 그 극장에서는 겨울이 되면 한 교회에서 여는 무료 크리스마스 캐럴 공연과 아이들 놀이 프로그램도 운영하였다. 그 외에도 M&S나 동네 도서관에서 짧은 방학이나 이스터나 추수감사절 등 자주도 있는 영국의 특별한 날마다 무료나 저렴한 행사가 있다. 이런 이벤트에 참석하면 영국인들은 어떻게 즐기고 그런 행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각이 늘어난다.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글을 읽거나 티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이해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이 올라왔을 때는, 먼저 방학 특강으로 메리 포핀스 뮤지컬 수업을 일주일쯤 들어보고 아이가 좋아해서 귀국 전 학기에는 뮤지컬 수업을 주말마다 다녔다. 보통은 영국에 오자마자 가는 곳이지만, 우리는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뒤늦게 런던 타워와 세인트폴 성당, 윈저성을 다녔는데, 아이는 오디오 가이드나 미디어 가이드를 통해 그간 학교에서 보낸 준 책들의 내용을 종합해보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의 2년 영국 생활과, 영어와 영문화를 갈무리가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