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영국학교 적응기
나이 마흔에 초등학교 적응이라니. 잘하진 못해도 안 해보지는 말자는 모토로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출근을 하고 남편이 영국에 머무는 3개월 사이 PTFA 회의가 있어서 남편이 한번 다녀왔고, 거기서 만난 N의 엄마는 그 이후로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해주었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총회 비슷한 학부모회가 있다길래 가보자는 생각을 했고, 작은 강당이니 너나없이들 많이 와서 조용히 묻혀있을 수 있겠지 생각했다.
강당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서 저 구석 작은 아이들 보라색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관찰자 모드로 엿보고 있는 스스로를 상상하며 9시에 걸어 들어갔다. 아아...... 원형 테이블 3개, 선생님 빼고 본인 포함 다섯 명. 직감적으로 '이건 실수다.'싶었다. 남편은 작년에 PTFA에 다녀오고도 이렇게 극소수가 모인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왜?!
PTFA는 Parent, Teacher, Friend Association의 약자이다. Parents와 Teacher까지는 알겠는데 Friends는 뭘까. 영국 학교 설립은 우리처럼 단순하게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주체들의 펀딩으로 설립되고 유지되는데, 그중 커뮤니티 스쿨은 교회 같은 Charity단체가 주최가 되어 지자체와 지역의 펀딩을 받아 세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의 운영의 주체가 학교 하나가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 그 외의 협력 주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나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도 눈치챘을 것이다. 이메일도 똑바로 읽지 않고 구석에서 엿볼 생각으로만 갔던 나는 테이블에 어색하게 내려앉으니 갑자기 무대 위에 올려진 기분이 들었다. 최소한 PTFA의 시스템이라도 알았더라면 그렇게 서로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으려면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만 해도 몰랐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불편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인지 왜 왔는지 알 수 없는 동양인 이방인에게 계속 눈을 맞추고 한 번씩 질문도 해주고 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날 선생님 말씀이,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는 Reception이나 저학년까지는 학부모들의 관심이 학교 생활이라서 학교 활동에 참여도가 높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교외 활동이나 클럽으로 관심이 전환되어 PTFA에 참여도가 낮아진다고 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하셨지만, 쓸쓸해 보였다.
이제 와서 보니, 하필 참 어려운 회의에 참석하긴 했었나 보다. 학부모 회장을 뽑았고, 예산 회계 자리를 뽑다가 뽑지를 못했다. 그 2명을 채우기가 정말 어려워 결국 이메일로도 신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PTFA에서 이벤트를 열어 무엇을 팔고 어떤 학교 교구를 사서 얼마의 예산이 남았는지, 예산 결산 보고 같은 것도 했었다. 예의상(?) 그들은 PTFA 멤버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봐주었는데, 가뜩이나 주눅 들어 있던 내가 그런 걸 한다고 할 리가 없었다. 평소 더운 날엔 아이스크림을 팔고, 이스터에는 홈메이드 머핀이나 케이크를 기부받아 파는 걸 보며 저런 일에 손을 거들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운영되는지, 시스템의 체계를 모르니 결국 나서질 못했다. 그냥 한다고 들이댔어도 분수에 맞는 걸 시켜줬을 텐데, 그때는 뭐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 이후로 할 수 있는 만큼 학교를 도왔지만, PTFA 회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까?
한 줄로 서
뒤처지지 말고 빨리 가자
물 밟지 말고 지나가
한쪽으로 붙어
같이 붙어서 가자
이런 말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영국에 살면서 물어볼 방법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하는, 내가 모르는지 상상도 못 해서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이 직장에서도, 아이 학교에서도, 일상에서도 많았다. 그렇게 소리 없이 쌓여가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은 사소한 어떤 경험 하나를 우연히 만나면 시원한 파열음과 함께 터져나가 해소되었다.
스쿨트립이 뭐지?
여행을 간다는 거야? 수학여행 같은 거?
영국이 그렇게 거창한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동을 해서 어디론가 가는 모든 것을 스쿨트립이라 했다. 알고 보니 별거 아닌 걸 Trip이라고 하다니 '너무 용어가 요란하다.'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출장 가느라 이동하는 시간을 업무 캘린더에 쓸 때는 더 거창한 단어를 썼다. Travel. 나의 영어 감각이 그만큼 한미했던 거다. 그러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체험학습이라고 하고 우리가 어릴 때는 견학이라고 했던 모든 것을 스쿨트립이라고 했다. 걷건 차를 대절하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건 학교를 떠나 어딘가로 가는 것을 스쿨트립이라 했다. 차를 대절해서 갔던 강 건너 햄튼코트팰리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갔던 런던 시내 사이언스 뮤지엄, 보통 스쿨트립이 그렇듯 20-30분 도보로 갔던 뮤지컬 관람, 소방서 견학, Year3에 시작되는 수영 수업을 위한 도보도 스쿨트립이었다. 아이들을 이끌고 가야 하니 선생님들끼리는 무리인 것이 당연했다. 매번 학교는 스쿨트립을 도와줄 자원자를 모집하는 이메일을 보냈고 때때로는 급하게 인원이 부족하니 학교 사무실로 전화를 달라는 메일이 날아들곤 했다.
겁 없이, 아니 엄청 겁내며 나를 이겨내는 각오로 스쿨트립 볼룬티어를 신청했다. 과연 나는 그들에게 헬퍼였을까 골칫덩이가 하나 추가된 것이었을까. 그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나의 욕심이 이겼다. ‘그 사회에 얹혀살지 않겠다, 역할을 하겠다.’ 이것도 능력이 될 때나 아름다운 것이지, 능력도 미달인데 책임을 갖겠다고 하는 건 민폐는 아니었을까. 그거 뭐 애들 인솔하는 거, 어른이면 할 수 있는 거지 싶을 수도 있지만(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신청했다) 함께 학교 다니는 아이 엄마들 중에 봉사를 자원하는 건 나뿐이었다고 하면 외국에서는 이 작고 쉬운 것조차도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한 지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당장, 신청하기 전부터 만 가지 고민이 쏟아졌다.
언제까지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뭘 맡게 될까?
몇 명이나 인솔해야 할까?
그래! 전에 한국 어린이집에서 봤던 것처럼 고리를 이어서 아이들이 잡고 갈 수 있도록 하자! 며 파운드샵에서 플라스틱 고리를 사서 끈으로 열심히 연결해서 가방에 잘 숨겨갔다. 나름 스마트한 방법일 거라며 아이디어를 혼자 뿌듯해하기도 했지만 한편 이 방법이 통하는 건지 아닌 건지 낯선 문화 앞에선 소심해져서 비장의 무기처럼 숨겨 갔다. 숨겨가길 잘했지. 그리고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할 필요 없었는데...
출발을 위해 아이들은 학교 앞에 두줄로 쭉 늘어섰고 긴 거리를 인솔해야 하는 선생님들의 표정에서는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고리? 그런 건 필요 없었다. 학교는 부모들을 자기 아이 근처에 배정해줬고 아이와 손잡고 가는 절친 레이시까지만 맡으면 됐다. 레이시는 날 무척 반가워했다. 우리도 어릴 때 누군가의 부모가 오면 유난히 궁금하고 말을 걸고 싶고 관심이 갔던 것처럼 아이들은 누구 엄마냐고 물었고, 묻지 않아도 지나가다가 자기는 이 골목에 산다고 알려주고, 자기 부모는 여기 일한다고 알려주고 인기 만점이었다. 엄살쟁이 엔비는 지금 생각해보면 관심을 끌고 싶었는지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며 이럴 때 어떻게 해줘야 할지 너보다 더 모를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우리 아이는 친구들이 자기 엄마에게 관심이 쏠리는 게 쑥스러운 것 같았다. 어쨌거나 아이들 사이에 대꾸를 성실히 해주는 인기 엄마가 되었고, 아이가 학교 생활하며 친구들에게 조금 더 관심받고 긍정적 감정 대상이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그날 이후 등하교 시간에 나에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생긴 거 보면 효과가 없지 않았던 게 아닐까?
스쿨트립, 그 길 위에서 알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케어가 필요한 아이들을 맨 앞과 맨 뒤에서 손을 잡고 관리하며 간다는 것을. 그리고 중간에 배치된 어른들은 차 진출입로나 횡단보도에서 아이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막고 서 있으면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건너게 한다는 것을. 위험하게 놓여진 공사자재 앞에서는 아이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아이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지키고 서 있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몰랐던 학교 생활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In a line
Keep up
Keep the puddle
Keep left/right
Bunch up
작은 동네 박물관 킹스턴 뮤지엄에 그렇게 도착했다.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만 5-6세 아이들을 걸려서 견학 간다는 것은 참 놀라웠다. 아이들은 킹스턴의 역사와 옛날 학교의 학생들이 입던 의복을 입어보는 체험도 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이가 집에 와서 이야기했던 친구들의 특성, 평소에 다른 학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아이들의 평가와는 사뭇 다른 진짜 그 아이들의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늘 나서기 대장일 것만 같은 해박하리라 생각했던 C는 생각보다 조용히 수업에 참여했고, 문제아라 들었던 H는 곧잘 킹스턴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물론, 내 아이가 생각지 못하게 스스로를 챙기지 못하는 부분도 보였다. 학교 생활 안에서의 아이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참석이었다. 게다 마흔 줄에 절대로 해볼 수 없을 영국 초등학교 생활을 아이 덕분에 경험할 수 있어 흥분되었다. 역사공부와 의복체험 후에는 워크시트를 갖고 박물관 내부를 돌아다니며 보물찾기처럼 정보를 찾으러 다녔다. 영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정말 흔하고도 인기 있는 것이 Treasure Hunt와 Badge이다. 보물찾기라지만 상품이 있는 것은 아니고, 숨은 것이나 정보를 찾아 적거나 스탬프를 찍어 모으는 것을 달성하는 것이 Treasure Hunt이고 소박한 체험이나 견학을 끝내면 배지를 주는 문화도 있다.
박물관과 붙어있던 도서관까지 견학하고는 근처 잔디공원에서 팩 런치를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주는 팩 런치는 맥도널드의 맥런치만도 못해 보였다. 아이는 아직 이때만 해도 영국 점심식사를 간식이지 식사라고 생각하지 않던 때라 한국식으로 김밥 도시락을 싸주었더랬다. 아이는 우리 음식에 당당했다. 이런 종류의 멘탈이 강한 건지 개의치 않았는데, 아토피가 있어 평소에도 도시락을 싸가던 어떤 한국인 친구는 반 친구가 이게 뭐냐고 묻는 말에도 다르다는 것이 싫은지 집에서 볶음밥이나 쌀이 들어간 동양식 음식은 싸가길 거부하기도 했다. 휴가까지 내고 따라갔던 스쿨트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문화와 언어를 배웠지만, 쓸모 있는 봉사자였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자존감이 떨어져서 그랬는지 바로 다음 소방서 견학 때는 스쿨트립 볼룬티어에 지원하지 않았다. 회사 일이 있어서 휴가를 내기 애매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내심 실망했음에도 피하고 싶었다. 학교 뉴스레터 사진을 통해 아이가 소방 호수를 잡아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는 것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해 겨울, 혹하는 메일이 하나 날아들었다. 아이들이 킹스턴 컬리지에 뮤지컬을 보러 가는데 볼룬티어를 찾고 있었다. 지난 경험에 따르면 인솔만 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수업하는 것도 볼 수 있었던 걸 보면, 이번에 가면 아이들 뮤지컬이라지만 뮤지컬을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역시, 한 번의 경험은 두 번째의 지혜를 낳았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스쿨트립 볼룬티어를 신청했다. 2018년 12월 11일. 그래도 전에 한번 해봤다고 교실에 들어가서 아이들이 안전 조끼 입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이번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지는 않았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노래인지 선창을 하니 아이들이 떼창을 시작했다. '이 녀석이 이런 것도 하네?'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들의 병아리 같은 즐거운 목소리가 길거리에 퍼졌고 지난번보다 더 긴 길을 아이들은 그렇게 즐겁게 걸어냈다. 선생님들도 그 노랫소리에 스쿨트립의 긴장이 해제된 얼굴이었다.
기대하고 갔던 뮤지컬 공연장은 무대가 너무도 소박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기대하고 갔던 뮤지컬 공연장은 무대가 너무도 소박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의 유치원 재롱잔치 무대보다 낫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공연을 기다리며 설레는 눈치였고 이번에도 엔비는 엄마가 따라온 우리 아이에게 부쩍 친한 척을 해 보였다.
조촐한 무대에 비해 공연의 내용은 알찼다. 뮤지컬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가정과 직장, 산업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남자들이 참전을 한 동안 산업 현장에는 엄마들이 일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빠들이 돌아오자 엄마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엄마는 일을 놓고 싶지 않았고 전업주부로 돌아가기에 일에 열정이 있었다. 전쟁통엔 비행기 프로펠러를 만들던 사업장은 더 이상 프로펠러가 필요 없어 문을 닫게 생겼는데, 엄마가 아이들을 위한 악어 장난감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사장은 콧방귀를 뀌었고 아빠도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이라 하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기적처럼 악어 장난감은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고 엄마는 직업여성으로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였다. 배우들의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라이온 킹에서 동물 소품과 하나 되어 동물을 연기하는 동작이나 놀림들이 놀라웠는데, 그 작은 버전의 악어 연기는 영국이 역시 뮤지컬 산업이 발달한 나라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렇게 작은 무대의 기회가 많고, 티비 드라마처럼 연극이나 뮤지컬이 일사적인 영국에서는 배우들도 설자리가 많겠구나, 대단한 제작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연이 흔하다는 건 관객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길이 든 스쿨트립. 영국에 간 지 1년 반이 넘어가던 3학년이 되던 가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수영 수업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30분 도보의 수영장까지 걸어간다는 내용과 함께 몇 달 동안의 일정을 주면서 봉사가 가능한 날을 제출해달라고 학교에서 레터가 왔다. 한국 엄마들이라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비효율의 극치. 게다 애들을 30분을 걸린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을 한국.
내년 봄에 수영을 좀 시작하지
하필 가을부터 한겨울 사이에 수영 수업을 한담.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9월 말 10월 초에 수영을 간다고 하니, 그리고 영국의 수영? 당연히 아이들 샤워들도 안 시키고 수영장에서 나온 젖은 머리 그대로 그 날씨에 학교 돌아올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니, 첫날 따라가서 지켜보고 아이에게 앞으로 스스로 어떻게 챙겨야 할지 조언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영 스쿨트립 첫날에 똭! 신청을 했다. 영국 생활 짬이 좀 생겼나 보다.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학교에 오라는 시간에 도착해서 오피스 로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 인도네시아 엄마가 더 왔다. 그 엄마는 처음의 나보다도 영어를 더 못했고 자기 아이 옆에만 붙어있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 지원자가 많지 않구나, 한국 엄마들도 하기 싫어하는 거 한번 가보면 아이들 생활도 보이고 좋다고 설득했지만 현지 엄마들조차도 잘 안 오는구나' 싶었다. 그날 스쿨트립은 자원자가 없어서 유난히 어려웠다. 한국인의 기민함은 영국인 교사보다도 나았다. 일사불란하게 자기 역할을 맡아서 해내는 한국인들과 달리 옆반 담임인 흑인 선생님은 미스 보드릭이 오라 가라 해야만 역할을 했다. 체육 선생님 미스 보드릭은 나에게 보통은 선생님들이 하는 선두를 맡기고 요관리 대상인 에이브라함의 손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횡단보도를 지켜서는 것까지 맡겨서 그 계절에 뛰어다니느라 땀이 흠뻑 젖었다. 그래도 보고 들은 풍월이 있다고, 횡단보도를 가로막고 좌우를 보고 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고, 기다려준 차에게는 손인사로 고맙다고 인사를 척해주었다. 이게 한국인의 보통이야 봤지?
수영장 문에 들어선 미스 보드릭이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안도감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서로 숨을 몰아 내쉬며 웃으며 바라보니 동지애가 느껴졌다. Thank you와는 깊이가 다른 고맙다는 표현을 했다.
Truly appricate for your help.
보드릭은 다음 스쿨트립에도 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다음에 나도 없이 혼자 진땀 흘릴 보드릭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고 생각에도 없던 말이 튀어나왔다. "매주 올게요." 회사 일정을 맞출 수 있을지 없을지 사리 분별도 하지 않은 채 말이 먼저 나갔다. 첫 스쿨트립에 짐덩어리 같았던 내가 1년이 지나고 역할을 해내는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하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수영장 공사로 수영 수업은 세 번 만에 끝이 났다.
애들이 몸에 겨우 물만 묻히고 나온 듯한 30분의 수영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물 한번 끼얹어도 않고 물기만 없앤 채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건, 어쩜 예상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영국의 수영장은 락스 냄새도 엄청나는데 말이다. 학교에 가면 바로 하교니 잽싸게 집에 가서 씻기는 수밖에 없었다. 참, 이미 그때는 나도 더러운 영국인이 다 되어서 개인적으로 강습을 다닐 때도 물로만 헹구게 하고 집에 와서 씻던 시절이었으니 그리 당황할 것도 없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었고,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더러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이 한창 전기에 대해서 배우고 있을 때였다. 12월쯤 학교에서는 사이언스 트립을 간다는 거창한 말을 하며 스쿨트립에 함께 갈래?하고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그냥 얼마 전에 킹스턴 구청에서 동네에 설치한 크리스마스트리와 킹스턴 역 앞 전구 돔에 들르는 것뿐이었다. 한국적 사고로 보면 굳이 그게 무슨 학습적 의미가 있다고 20분씩 걸려서 다녀오나 싶지만, 작은 것에도 큰 의미를 두고, 소소한 것에 크게 즐거워하며 사는 영국인들이다. 작은 데서 행복을 잘도 찾는 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부럽다. 귀국 전 마지막 스쿨트립일 줄 알았기에 마지막 봉사를 가기로 했다. 세상 다 짊어진 듯 고민했던 첫 번째 스쿨트립 갔던 그 사람이 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다. 안다는 건, 익숙하다는 건 참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