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로운 영국 초등 생활
영국초등학교는 사립이나 공립이나 교복을 입는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교복을 입지 않는 행사날도 그렇게나 많다. 처음 학교 뉴스레터 학교 일정에 Mufti Day라는 걸 발견하곤 "이건 또 뭐냐"며 구글링을 했다. 이메일에서 괄호 안에 콕 집어 설명해주듯 교복을 입지 않고 자유복을 입고 오는 날이다.
Mufti Day는 하도 많아서 다 기억할 수도 다 소개할 수도 없다. 이런 Mufti Day는 왜 있는 걸까? 영국인들은 기억하고 기리기를 좋아한다. 앞서 겪은 나라, 선진국이기에 실패도 많지만 그 실패를 잘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며 고쳐나가는 것이 영국이다. Mufti Day는 그런 영국 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Mufti Day들은 보통 기억해야 하고 모금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아야 하는 날 특별한 색깔의 옷을 입고 £1를 기부하는 날이다. 이런 날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이나 학교 직원들도 그 색깔의 옷을 입는다.
대표적으로 안티불링데이(Anti-Bullying Day)가 있는데 학교에서는 파란색 옷을 입고 오라고 했고 £1를 기부할 수 있으면 좋다고 이메일이 왔다. 안티불링은 안티불링 주간이 있고 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할 정도로 중요한 이슈이자 행사이다.
영국은 우리에 비해 자폐에 대해 개방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쉽지 않던 자폐아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영국에 자폐가 많은 것인지 자폐에 열려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리송하다. 꼭 자폐가 아니더라도 SEND(Special Education Needs)라고 부르는 약간의 정신적 지적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학교에서 운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자폐에 대한 Mufti Day를 통해 자폐 진단을 돕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도 하고 아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운동장에서 소소한 행사를 한다.
NSPPC는 Nation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의 약자로 아동 학대 방지를 위한 자선단체이자 활동이다. 요즈음처럼 친부모 양부모 할 것 없이 학대가 일어나고 미성년에 대한 성폭행 범죄도 빈번한 흉흉한 사회를 보면, 우리 모두 한 번씩 기억하고 도울 수 있는 날을 정하고 꼭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도 다수가 하나의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사회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Rednose Day는 아프리카의 기근을 돕기 위해 1985년에 시작된 Comic Relief라는 행사의 하이라이트 행사로 1986년 4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굉장히 큰 행사로 캐나다 등 서양 국가에서 같은 행사를 하고 있다. 이즈음 되었을 때 아이는 기부에 아주 익숙해졌고, 학교 등교하는 문 앞에서 선생님께서 £1를 걷으니 기부를 아주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꼭꼭 £1를 챙겨가서 냈는데 Rednose Day에 그 £1를 잊었다. 사실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는 £1였지만 아이는 잔뜩 뿔이 나서 학교에 들어갔다. 다행히 그다음 날 마틸다 공연을 보러 갔을 때 공연장 복도에서 모금을 하고 있던 봉사자에게 £1를 기부하고 아이는 속 후련해했었다. 그때만 해도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을 하지 않던 나이었는데 £1의 기부가 그렇게 중요했던가보다.
이렇게 대외적인 Mufti Day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모금이나 기부가 필요할 때 Mufti Day를 하기도 한다. 11월 말에 있었던 Mufti Day는 가장 좋아하고 재밌는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이유인 즉은, 학교 교구 마련을 위해 Secret Present Stall을 운영한다는 것인데, 기부받은 물품들을 하교 시간에 판매한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학교가 대부분 공립이고 나라에서 대부분의 예산을 지원받으니, 학교가 이렇게 가난해 보이게 돈을 모으려고 장사를 하고 기부를 받는 것이 참 낯설지만 영국의 학교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완벽한 사립이 아니어도 일정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학교들이 상당히 많다. 뭐, 아이들은 옷도 마음대로 입고, 학교 마당에서 장사를 하는 이벤트도 볼 수 있으니 신나는 날이 되겠다.
가장 대표적인 Mufti Day는 크리스마스 행사 Mufti Day이다. 보통 크리스마스 전 금요일에 방학식을 하는데 그날 크리스마스 점퍼를 입고 가기도 하고 학교도 조금 일찍 마칠 때도 있었다. 우리는 그냥 겨울 스웨터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종류를 영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점퍼라고 부른다. 조금이라도 문양이 크리스마시(Christmasy)하면 그렇다. 사슴이 그려져 있으면 딱 걸린 거고, 로빈이라는 겨울에도 이동하지 않는 새가 그려져 있어도 크리스마스 점퍼이다. 색깔이 빨강이나 초록이면 빼도 박도 못하게 크리스마스 점퍼이고, 조금 춥다고 입었더니 "꽤 이른 크리스마스 점퍼네?"라며 회사에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시선이 느껴져서 그 이후론 인형 눈 달린 사슴 스웨터는 크리스마스 주간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우리에겐 그렇게 평범한 겨울 스웨터가 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점퍼라는 특별한 명절 옷처럼 여겨졌다. 학교에서도 크리스마스 점퍼를 입는 Mufti Day 이벤트를 했고 £1 모금된 돈은 세이브 더 칠드런에 보내진다고 했다.
처음에는 왜 갑자기 교복 아닌 집에 있지도 않은 색의 옷을 입고 오라고 해서 급하게 사야 하게 만드는지,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슨 돈을 그렇게 걷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시나브로 물들며 Mufti Day를 즐기게 되었다. 길거리를 가며 다른 학교 아이들이 특별한 옷의 색을 입고 등교하는 날이면 '오,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찾아보게 되었다. 영국의 기부 문화는 국가가 사회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관장하는 우리와는 다른 사회경제구조에서 비롯되었으니 기부 문화가 많다는 것은 꼭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부를 빼더라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사람들이 공통된 하나의 행동을 함으로써 관심을 갖게 하고 잊지 않음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소소한 방법은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