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아닌 영국 리터니 엄마의 한국어 & 영어 고민
다들 그랬다. 영국을 도착했을 때,
아이가 금방 한국어를 잊어버릴 거라고.
영어는 걱정일랑 하지 말라고.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그랬다.
한글을 떼고 가야 한다고.
나도 영국을 떠나올 때, 갓 도착해서 아이 영어를 걱정하고 있던 분께 그 심정 알면서도, 한국어를 꼭 붙들으라는 말만 하고 말았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조기교육 혐오자였던지라 6살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한국 나이 7살에 접어들며 영국에 갔기에, 5-6살 어릴 때 간 아이들에 비해, 한국어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제 한국어로 못 알아듣는 게 있으면 "네가 그걸 몰랐어~? 아직 귀엽네."라며 외려 신기해지는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 한국어가 큰 문제일 거라고 생각을 못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2년이 지나고, 대충 들었을 때는 한국어 의사소통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맞아!”가 아니라 "알아! I know"라고 맞장구를 친달지, "신발 입어 Wear shoes"랄지, 자주 먹는 '만두'라는 단어를 잊어버려서 “그게 뭐지 그게 뭐지” 그랬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와 문자였다. 영국에서 한국 1학년 들어가는 시점이 되었을 때쯤 이제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겼다. 영국 학교에서 보내주는 영어책을 읽을 때 영영사전으로 찾아서 알려주던 단어도 네이버 사전을 찾아서 한국어로 알려주었다. 영어보다는 한국어 단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그런 기회에라도 한국어 단어를 접하게 해줘야겠다 싶었다.
한글은 참 어려운 문자였다. 우리는 규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각종 변칙이고 예외가 수십 가지인 문자였다는 것을, 귀국 후 아이에게 한글을 똑바로 가르치면서 알게 되었었다. 오히려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대부분 다 틀리게 되는 문자가 한국어라는 놀라운 사실. 외국 가기 전에 한글을 떼고 가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문자를 영어로 먼저 접한 아이에게는 한글은 아주 어려운 글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문권 사람들이 어원이 비슷한 다른 언어인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을 배우는데 600시간, 하루 4시간씩 배우면 5개월이 걸리고, 아무리 낯설고 어려운 언어라도 1,100시간이면 되는데, 한국어는 2,200시간, 거의 4배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반대로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썩 이상할 것이 없고, 유럽권 사람들이 4개 국어씩 흔하게 하는 데는 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 중에서도 문제는 (이해력 없는)읽기, 쓰기가 아니라 한국어적 사고였다. 영어로는 일기도 에세이도 쓱쓱 써 내려가는 아이가, 한국에서 온라인 개학을 하고 일기를 쓰는데,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일기를 1시간 넘게 잡고 있었다. 영어로 쓰고 한국어로 옮기려고 해도, 문장을 구성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한국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기라고 해서 쓱-하고 옮겨지는 게 아니듯 말이다. 그래서 영어학원에서 유행했던 광고 문구 "영어적 사고"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한국어적 사고도 모국이 한국이라고 해서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어의 이해는 귀국 1년이 지난 뒤에도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한국어는 한자어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단어들이라는 점에서 낯선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문해력 난이도가 높은 언어이다. OECD국가 문해력 데이터를 보면 뜨거운 교육열의 우리나라가 놀랍게도 평균 이하이다.(젊은 계층을 대상으로 하면 굉장히 높다고도 한다.) 그런데 다른 각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같은 약의 복용 설명서를 놓고 보면, 영어로 쓰인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있지만, 한국어 설명서들은 전문 용어에 가까워 보인다. 그 외 관공서 홈페이지만 봐도, 그 차이가 크다. 런던 지방 관공서 홈페이지 업무 관련 부분을 한국어 페이지로 만들 일이 있었는데, 영어로 쓰인 원문이 너무 구어체라서 한국어로 옮기면 공신력 없는 장난글 같이 느껴졌던 지라, 어려운 한국말, 관공서적인 용어로 옮기는데 많은 에너지를 썼었다. 한국어는 어렵다.
사실, 우리 아이는 영국에 2년밖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링규얼을 논하기엔 쑥스럽다.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이인데 1년 반 일찍, 그러니까 한국 나이 5세(만 3세)에 영국에 간 아이는 지금은 거의 한국어를 잃었다. 하굣길에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어로 물어보고 대답하게 하면 대화가 전혀 되질 않는다고 한다. 그냥 밥 먹어, 씻어 같은 돌쟁이 언어만 가능한 것이다. 4-5년이라는 절대적 기간이 길기도 하고, 많이 어려서 간 부분도 있다. 그리고 집에서 얼마나 부모가 한국어를 써주느냐 한글책을 읽어주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많이 달라진다.
다른 경우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 2학년까지 외국 소재 국제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지인이 있다. 그 지인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갔기 때문에, 전화통화로 네이티브와 통화할 때면, 그가 네이티브가 아닌 것을 상대가 알아차린다고 한다. 반면에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롭게 구사하고, 문서를 한글로 쓰는 것보다 영어로 쓰는 것이 편한 사람이지만, 영어를 모국어라고 느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외국인 전형으로 서울 소재 대학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국내 대기업에 취직하고 다닌 지 벌써 10년이다. 그런데도, 회사에서 쓰이는 문서를 이해하는 것이 물 흐르듯 되지는 않고, 영어 PT는 척척 만들지만 한국어 PT는 만드는 데는 고심을 하게 된다고 한다.
한 경우 더, 영국에 초5에 들어가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하고 영국 유명 로펌에 입사한 한국인이었는데, 일상 대화에서는 한국에서 자란 사람 같을 정도로 발음도 구사력도 좋았다. 필자가 영국 업무 용어를 익히느라 고생이라며 한국어로 이런 말이 영어로 이런 단어일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반대로 “제가 한국 가면 그 입장이겠지요.”라더니, 결국 한국 법인장으로 가지 않고 영어 사용이 가능한 나라로 돌렸다. 법조계 언어는 가뜩이나 한자어 투성이인데 외모가 완벽한 한국인이고 일상 언어 구사력으로 봤을 때 업무적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면 딱 오해 사기 십상이어서 본인도 곤란에 처했을 것이고, 노란 머리 법인장이 오는 것보다 조직적으로도 더 혼란을 야기했을 것이다.
타인의 경험과 우리의 경험을 종합해보면, 정규 교육과정을 어떤 언어로 배웠느냐가 주 언어를 결정하게 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언어로 평생을 쓴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대학교나 직장을 다니면서 그 분야의 언어를 더 배우게 되긴 하지만, 교양으로서의 고급언어나 언어 구사능력, 글쓰기 능력 같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딱히 더 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언어는 결국 시간에 비례하는 것 같다. 두 언어 모두를 성장기에 모국어로 생활하고 공부하는 '절대량 x 2'만큼 시간을 들여 쓰고 익히지 않는다면, 두 언어를 꼭 같이 잘하는 바이링규얼은 불가능해 보인다. 동시에 두 언어의 사회적 환경에 머물 수 없기에, 두 언어를 똑같은 수준으로 상향평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두 언어의 동시 하향평준화는 쉬워 보인다. 흔히 국적이 다른 두 부모로 인해, 바이링규얼인 아이들의 언어 발달 속도가 일정 나이까지는 느리다고 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실제로 우리 아이만 보아도, 같은 나이의 영국 아이와 당연히 영어를 비교할 수는 없고(특정 영역, 읽기에서는 더 나은 실력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학습 능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 전반의 영어가 더 나은 것은 당연히 아이다.) 한국어도 문해력이 뛰어난 한국 아이와 비교하면 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한 번씩, 만약 한국에서 쭉 살았더라면, 2학년이지만 그 아이처럼 고학년 책을 읽을 힘이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주재원들 중엔 아이가 한국어가 안되고 한국의 고강도 문화에 적응을 못해서 외국으로 계속 돌겠다는 부모도 더러 있다. 하지만 외모가 한국인인 이상 영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한국어가 유창하길 기대하기 마련이다. 모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취업 등 영국 사회에서 직업을 갖는 등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생각해보라. 학벌 좋고 영어 잘하는 영국인은 아주 많다. 게다 그들은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내려오는 튼튼한 인적 네트워크까지 갖고 있다. 굳이 한국인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귀국을 하든 영원히 영문권에 살든 한국인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완벽한 바이링규얼은 없다지만, 모국어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