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륨 빌런의 반전 취향

그는 산적st였다

by 김서니

이어폰과 헤드폰 너머로 음악 소리 새어나간 것,, 경험해 본 적 있으신가요?


볼륨 잔뜩 높이고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나쁘지 않지요.

종종 흥에 취해 바깥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랫소리를 키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한테만 이렇게 크게 들리는 줄 알았던 거죠.


그 사실을 무심코 알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12인승 엘리베이터였을까요.

아침이라 그런지, 다들 시간 내 출근하기 위해

틈 없이 밀고 탑승한 밀도 높은 엘리베이터였습니다.


탈 땐 몰랐는데, 누군가의 음악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퍼지고 있었죠.


적막한 공간을 울리는 발랄한 노랫소리..

어떤 노래였는지는 흐릿합니다만, 본인이 알면 이불킥한 노래였던 건 기억합니다.

웃참과 동시에,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지 않나…?’


본인 + 대리 수치로 아침부터 얼굴이 화끈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경험 이후로는 밖에서 노래를 들을 때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소리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나의 음악 취향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볼륨 빌런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이었죠.


*



집보다 밖에서 일이 잘 되는 프리랜서라 공유오피스를 구해 다니고 있는데요.

제가 일하는 공유오피스에 볼륨 빌런이 한 명 있습니다.


자유롭게 대화하며 소음에 민감하지 않은 다른 공유오피스와는 달리

이곳에서의 소리는 오직 음악뿐입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독서실 같은 분위기인 것이죠.

그래서 작은 소리도 굉장히 잘 들립니다.

누가 크게 웃기라도 하면 ‘호탕한 사람이네’할 정도이고,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통화라도 하면 주변 생중계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 이곳에 볼륨 빌런이 나타난 겁니다.

과연.. 고막 건강이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헤드폰을 뚫고 흘러나오는 소리가 엄청 났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볼륨 좀 줄여주세요.’라는 말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덩치가 산만한 분이라, 말 붙이기도 무섭기 때문이지요.


미친놈이 워낙 많은 세상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것이

이 쫄보에게는 중요한 미덕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괜히 그 노랫소리에 정신을 뺏기는 것이, 약한 저의 집중력 탓인 것 같아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몇 시간, 며칠 동안 그러니

약한 집중력이고 뭐고, 슬슬 신경질이 나더라는 겁니다.

자리를 옮길까, 몇 번 고민도 했었는데 다행히 며칠 동안 나오지 않더군요.


그 덕에 잊고 있었습니다. 그의 헤드폰 데시벨이 어느 정도인지..


그러다 오늘, 한층 떨어진 구역에 그가 자리 잡은 걸 발견했습니다.

‘앗싸, 오늘은 방해 안 받겠군.’ 안도와 함께 씨익 웃고는 제 자리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끝났다면, 제가 글을 썼을 리 없습니다.


자리에 앉은 지 채 5분이 되기도 전에, 저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


어딘가 막혀 있는 벽에 쿵쿵 부딪히면서도, 그 벽을 뚫고 나올 정도의 큰 소리.

이건 볼륨 빌런의 헤드폰 너머의 소리인데...? 하지만, 분명 멀리 떨어져 앉았는데..?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들고 살피니,

50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볼륨 빌런의 자리에서 들리는 소리가 맞았습니다.

그 구역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를 쳐다보는 모습에서 확신할 수 있었죠.


정말.. 대단합니다.

이 정도 거리에서 들릴 정도라면, 그의 고막 건강을 걱정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노래 가사가 또렷하게 들려올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무슨 노래 듣는지 다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나 어지러웠어 기댄 것뿐이야 날 오해하지 말아 줘’


쿨의 애상이었습니다.



‘나 역시 많은 여자들 만났다가 헤어져도 봤지만 한꺼번에 많은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어’


반복재생이었는지, 계속 나오더라는 겁니다.


저도 이 노래 참 좋아하는데요..

따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흥겨웠지만, 참았습니다.


이전까지는 피하고 싶은 그였지만, 노래 가사가 들리니 어쩐지 흥미로운 겁니다.


외양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순 없지만

(외모 비하 아닙니다) 산적 같은 외모에 귀엽, 찌질한 노래가 참 언밸런스 하더군요.



힙합이나 락 장르 음악을 들을 거라 생각했던 나, 선입견 가진 나,, 반성해,,


아마 소리가 새어나간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만..

이제는 방해된다기보다는 그냥 재미있었습니다.


애상만 주구장창 듣던데, 언제까지 듣나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남의 고막까지 닿는 그 소리를 누군가 참기 어려워 얘기를 한 것인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음악 소리가 뚝 끊겼습니다.


강력한 외모, 강력한 소리를 내는 그에게 볼륨을 줄여달라 말한, 용자.. 누구입니까.

덕분에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용자여.




소소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이런 의미 부여와 사람에 대한 관찰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나름의 즐거움을 부여하는 의식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도 즐거운 일로, 평온하게

오늘 하루 마무리하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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