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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니 Sep 30. 2024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아. 쓸수록 나아가니까

‘싫지 않은 나’를 늘려가는 법

책상이 아주 엉망진창이다. 매일 흐린 눈 하다가 하루 날 잡고 정리하는 편인데, 정리 주기가 사절기와 같다. 문제는 정리를 해도 깔끔한 상태가 며칠 못 간다는 거다. 주인 잘못 만난 책상은 일 년에 네 번 목욕하는 꼴인데, 금세 꼬질꼬질해지는 모양새다. 그뿐일까. 온갖 잡동사니를 무겁게 이고 있다가, 짐을 내려놓을라 치면 또 쌓고 어지르는 주인인데.. 잘못 만난 게 아님 뭐란 말인가. 엄마는 내 책상을 볼 때마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휴, 니 책상 하나도 제대로 정리 못해서 어떡할래." 아마도 '앞으로' 어떡할래,라는 뜻이었겠지. 책상에서 딸의 미래(?)를 본 거다. 



이런 정리 열등생도 꽤 자주 정돈된 (게다가 그럴듯한) 형태로 무언가 정리할 수 있는 때가 있는데, 바로 쓰는 때다. 말은 뉘앙스나 제스처가 조력자가 되어 대충 내뱉어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지만, 말과 달리 글은 오직 글뿐이라 나오는 대로 내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는다. 헝클어진 생각의 실뭉치를 눈이 빠져라 보면서 하나하나 푸는 수밖에. 


글을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생각 정리가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건 은근한 뿌듯함이다. 글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면 결국엔 끝을 냈다는 안도와 일을 매듭지었다는 만족이 찾아온다. 중도포기를 밥 먹듯이 하던 내가 조금 나아진 것도 같고. 


나를 좋게 바라보는 건 또 이런 때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것들의 고유함을 포착해 글로 남길 때. 쓰다 보면 세상의 크고 작은 것들을 귀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당연히 이런 마음을 가진 나는 ‘싫지 않은 나’들 중 하나다. 


내가 싫을 때 혹은 남이 미울 때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푹 담가져 있을 때는 어떠한가. 해소 없이 담아두고 삭히려 할 때면, 꼭 자신을 학대하거나 주변에 화풀이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 글을 썼다. 나에게 나를 더 싫어할 여지를 주지 않도록, 차분히 글에 감정을 덜어냈다. 글쓰기는 ‘자기혐오’가 그득한 바다에서 ‘자기 이해’라는 튼튼한 뜰채로 스스로를 건져 올리는 자구책 같은 거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한발 물러서 감정을 마주함으로써 나는 혐오할만한 사람이 아니고 이해할 대상이라는 걸 안다. 그러고 나면 이런 내가 그리 나쁘지만도 않다고, 어쩌면 조금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위로의 방향 나에서 타인으로 바뀌기도 한다. 내 글을 통해 위로받고 기쁨을 얻고, 덜 외로울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이것들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좋은 사람이란 말인가. 


글쓰기는 내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일이므로, 괜찮은 사람이 괜찮은 글을 쓸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람은 쓰는 대로 살고자 하므로, 괜찮은 글이 괜찮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좋은 글에는 구심력이 작용하니까. 

글을 쓴다고 훌륭한 혹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쓸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쓰는 일의 미덕이다.


그러니까 책상 정리쯤은 못해도.. 괜찮지 않을까..? 

더 자주 많이 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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