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싱숭생숭하고, 울적하고, 서글픈 기분
‘가을 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웬 가을을 타나 싶었는데 제가 요즘 그러고 있습니다.
가을 타는 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한다면.. 그 비슷한 걸 경험하는 중인 것 같은데요.
우울까진 아니지만.. 조금 울적한 것도 같고
살짝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ㅋㅋㅋㅋ웬 청승이랍니까 진짜..
아주 생경한 요 며칠입니다. 왜 이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원인이 분명하지 않아 뭐라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슴까지 찬 물속에서, 바닥 깊이를 좀 가늠해 보려는데 발 끝도 안 닿는 기분입니다.
조금 더 아래로 들어가면 닿을 것 같기도, 안 닿을 것 같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물속에 떠 있는 느낌이지요.
기사를 검색해 보니 가을 타는 건 일조량이 줄어서라는데.. 이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름보다 햇빛을 더 많이 맞고 있는 요즘이거든요.
가을 햇빛의 무자비함을 몸소 느끼는 중이지요.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나온 여러 이유 중 가장 그럴듯한 건 ‘나이 듦’인 것 같습니다.
미디어에서는 연일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 떠들어대고
문구점 매대에는 벌써 신년 다이어리가 진열되어 있는 걸 보니
달력 상으로는 아직 10월이지만, 마음은 이미 12월 말입니다.
한기가 스미는 아침저녁의 공기가 연말 느낌에 박차를 가한 것 같고요.
하지만 저는, 나이 드는 게 싫지 않은 사람인데 말이죠.
살면서 나이 드는 일을 긍정하면 긍정했지, 싫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인지 이것이 갑자기 서글퍼지는 겁니다.
뭐 주름이 생기고, 숫자가 늘고 하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마음을 달구는 불의 화력 약해져 가는 게 문제였지요.
들뜨고, 설레고, 흥미로웠던 마음이 금방 식어버리는 요즘이거든요.
무얼 해도 금세 시들시들해지는 것이 ‘정말 나이가 들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했다고 해야 할까요.
죽음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ㅎㅎ
이 사실을 인식한 순간 ‘내가 올해 무얼 이루었지?’ 하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들더군요.
아무래도 그 때문에 기운이 빠져 축 늘어졌던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김수영 시인과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습니다.
괜히 싱숭생숭하고, 울적하고, 불안해 어찌할지 모르겠는 분들도
가져온 글 보시고 마음 잘 추스르시면 좋겠습니다.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그러니까 제 마음에 쫓기지 말자는 말이다. (…) 숙취 때문에 뒹굴다 깨어나보니 벌써 저녁일 때의 낭패감과 억울함.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시인은 묻는다. 그것들은 “혁혁한 업적"을 바라는 마음, 그러니까 빨리 꿈을 이루고 싶다는 갈급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는 자기를 제어할 필요를 느낀다. ‘개'와 ‘종'과 ‘달'이 밤이 왔음을 알려도 당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시인이 ‘서둘지 말라'고 말해주니 위로가 되기는 하는데 이게 언제나 유효한 말은 아닐 것이다. 미루는 게 버릇인 사람이나 수십 년 동안 그대로인 사회 시스템을 향해서는 오히려 ‘서두르라'고 일갈해야 할 일이 아닌가? 1연에서 그가 ‘같은 듯 다른' 세 가지를 함께 말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다. 서둘지 말고, 바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이 셋은 자주 엉킨다.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이룬 것이 없어 너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위험한 때다. 김수영이 걱정한 것도 그것이지 않을까. 빨리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지면 나를 잃고 꿈은 왜곡된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란 현실 앞에 의연해지려는 마음이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말이다. 달은 지구를 따라 끝없이 돈다. 이상(꿈)이 현실(삶)에 내려앉지 못하고 그렇게 겉도는/헛도는 사태를 보는 일은 괴롭다. 게다가 달은 차고 이지러지기를 반복하지 않는가. 김수영 자신의 꿈도 달의 모양처럼 날카롭다가 환했다가 비어 보였다가 그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공전할 때 기차는 어디로건 자꾸 떠나니 그 기적 소리가 어찌 들렸을까. “과연" 쓸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마르게 시동을 걸면 안 된다고, 그는 또 제 욕망에 제동을 건다.
<인생의 역사>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