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6월 출산 예정인 관계로
5월을 마지막으로, 세 자매 독서모임은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
작년 4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시작으로
1년 동안 안 쉬고 꾸준히 잘 달려왔다ㅎㅎㅎ
임시 휴업(?)을 앞두고 정한 5월의 도서는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작년 15회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실려있던 <혼모노>가 표제작이 된 단편집이다.
(책 정보 찾아보는 중 알게 되었는데, 올해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도 실렸다.)
이 소설이 말하는 건
7개의 단편집은 ‘진짜, 참, 옳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묶였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영화 감독을 덕질하는 이야기
‘스무드’는 아버지는 한국인이지만 자신은 미국에서 나고자란 이민자 자녀가 업무 차 한국에 왔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우연히) 태극기 집회에 휩쓸리며 겪는 이야기이고
‘혼모노’는 앞집으로 이사온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에게, 자신이 모시던 신을 빼앗기고 신력을 잃어버린 중년 남성의 이야기이며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을 강조하며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실 설계에 투입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우호적 감정’은 이해관계에 따라 프로젝트 사업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 세대 갈등 및 보상제도로 인한 사내 불화에 관한 이야기
‘잉태기’는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려는 부모,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통제하려는 그들의 욕심에 관해
‘메탈’은 같은 꿈을 키우며 자란 학창시절 친구들이 성인이 되고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달라지는 이야기이다.
각 작품별 표면적 줄거리는 이렇지만, 이면의 메시지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진짜’와 ‘본질’에 대한 고민이랄까. 아니 그보다는 무엇이 진짜고 본질인가에 관한 질문.
참이란 변하지 않는 것인데, 이 단편집에서 ‘진짜’는 인물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애초에 진짜 ‘진짜’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라는 명제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작품별로 살펴보자.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진실, 믿음, 윤리의식(+그로 인한 죄의식까지)에 대해
<스무드>는 (국적에 따른) 문화 정체성, 유대감에 대해
<혼모노>는 진짜와 가짜, 늙음과 젊음, 능력/자본주의에 대해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무사유/무비판의 위험성, 인간성, 주객전도에 대해
<우호적 감정>은 (인간의 감정, 태도, 관계의) 가변성에 대해
<잉태기>는 결핍, 부모의 욕심과 욕망, 부자연/인위성에 대해
<메탈>은 청춘, 현실과 이상, 삶의 정답에 대해 말한다.
작품들이 현실적이란 글을 어디서 보고 살짝 갸우뚱했다. 판타지스러움이 없음에도 왜인지 현실감이 없다고 느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겪었을 법한 그리고 주변에서 있었을 법한 이야기이긴 했다.
아이돌과 예술인 덕질도 해보았고
마음이 동하는 유대감도 느껴보았고
진짜와 가짜에 대한 시시비비는 매일 가리는 중이고
능력주의와 자본주의는 내 삶과 떼어낼 수 없고
무비판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며, 행동의 이유가 주객전도 되는 일쯤은 예삿일이니까.
그뿐인가.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감정과 태도, 타인에 대한 통제욕,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늘 우리 삶과 붙어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단편집이니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뽑아봐야겠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취향없고 개성없던 구보승의 광기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준 이에 대한 맹목성인가 싶었다.
스승 여재화가 말한 ‘인간을 위한 공간’에 집착하는 모습이 그러했으니까.
구가 ‘인간을 위한 공간’에 집착하는 건 여전했지만,
그가 집착하는 ‘인간을 위한 공간’의 의미는 점점 달라졌다.
제 생각에 이 공간엔 창을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조사자가 유리를 깨고 밖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고 자칫 비명이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 생기잖습니까.
희망?
죽고자 하는 사람도 빛 속에선 의지와 열망을 키웁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고, 흔들렸던 신념이 굳건해질 수도 있죠. (p.181)
선생님의 설계도에는 공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뭐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선생님, 피조사자들은 아마도 눈을 가린 채 계단을 오를 겁니다. 선생님이 설계한 대로라면 여기가 몇층인지 감으로나마 알 수 있겠죠. 안심할 겁니다. 계단 수를 세며 탈출 계획을 세울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선형 계단에는 층의 구분이 없습니다. 내가 몇층에 있는지 알 수 없죠. 방향 감각이 무뎌진데다가 계단 폭이 좁고 경사까지 가팔라 안정성마저 상실된다면, 그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극대화될겁니다. 그게 제가 설계도를 수정한 이유입니다. (p.188)
의미 변화의 화룡점정은 이 대목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여재화는 흠칫했다. 이제껏 구보승이 밀어붙였던 합리와 대척점에 놓인 사고였다. 드디어 인간을 고려하다니. 독학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기조를 깨달은 게 아닐까, 어렴풋이 유추하며 여재화는 안도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에 창이 없어선 안 되지.
네.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여재화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보승은 화색을 띤 채 말을 이었다.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p.191-192)
구보승은 마치 진리를 깨달은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여재화는 그 생각의 잔인함에 질겁했다.
(고문실 설계를 맡기로 한 이상 자신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 이렇게 경악하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그래서 더 경기를 일으킨 게 아닐까 싶었다. '본인'이 맡은 프로젝트에 이러한 잔인성이 담긴 것이니까. “난 이런 끔찍한 생각한 적 없다네” 192p)
목적과 수단이 도치된 시대였던 것처럼
‘인간을 위함’은 ‘인간성 보존’이 아닌 ‘인간성 말살’을 위함이 된다.
(물론 공간 활용 목적 자체가 고문을 위함이긴 했으나)
구를 광기에 사로잡히게 만든 건 무엇이었나.
그는 광기에 잡아 먹혀 인간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여재화의 큰소리에 구는 당황하기 전까지는. 옳다고 여긴 것이 흔들리고 확신이 모호해지지만, 구는 오기 때문에 끝내 단언해버린다.
도면이 완성되고 시공에 들어가자 모든 확신이 모호해졌다. 자신이 치밀하게 설계한 것들이 무얼 위함이었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어졌다.
허나 오기 때문인지 객기 때문인지 구보승은 여재화 앞에서 끝내 단언하고 말았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p.201)
그와 함께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은 유해진 듯 보이는 노년의 구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남자는 다시 갈월동을 천천히 누빈다. 간밤에 좋은 꿈 을 꾸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즉석복권을 한장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p.201)
그래서 총평은
책 띠지에 보면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박정민의 추천사가 있는데 확실히 단편영화 보는듯한 흥미진진함이 있었다. 오랜만에 빠르게 읽힌 책.
하지만, 작품별 메시지와 이를 하나로 묶는 메시지 모두 공감하는 것이었으나
그 이상의 어떤 반문은 없었다.
나중에 한번 더 보면, 처음에 보지 못한 걸 읽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