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늘이 아름다움을 뜻한다."
2011년에 나온 ‘미드나잇 인 파리’를 얼마 전에 넷플릭스 추천 차트에서 우연히 보곤, 꼭 봐야겠노라 마음을 먹고 며칠을 벼르다 드디어 영화 감상을 시작했다. 영화 치고는 길지 않은 94분이라는 러닝타임동안 과거와 현재의 파리를 오가며, 영화는 종국에 가서야, 현실의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영광스럽고 낭만적인’ 과거를 그린다. 영화에서 표현되듯, 모든 이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과거를 동경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이렇게 전한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늘이 아름다움을 뜻한다”고.
우선 영화의 내용을 살피자면, 주인공인 길 펜더는 자신이 돈에 쫓겨, 낭만 없는 21세기를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작가이다. 약혼녀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여행을 가게 된다. 대체로 불만족스러운 삶에서 그리고 재미없는 여행 중에, 어느 밤 기적같이 어떤 ‘마법’을 통해서 - 이것은 길의 약혼녀가 했던 말처럼 길 본인이 그려내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소망하는 환상말이다 - 길은 1920년대의 파리로 타임슬립을 하게 된다. 그 곳에서 대문호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그리고 오늘도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가로 평가 받는 피카소와 마티스도 만나게 된다. 그는 비로소 ‘영광스럽고 낭만적인’ 시대를 온 몸으로 느끼는 것에 무한한 만족감을 가진다. 그리고 파리로의 시간여행은 며칠 밤을 거쳐 계속된다. 그리고 길은 이 만족감에 도무지 질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고 원하던 말하자면 ‘최고’의 시대니까. 이렇게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낭만화된 과거에 도달함으로써 인간의 소망을 그려내고 있다. 길의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영화는 인간의 소망 그리고 환상을 표현해내고 있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인간은 겪어보지 못했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낭만화한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것에 더하여 마지막 부분에서 영화는 비로소 진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1920년대로 돌아가서 만나게 되었던 아드리아나와 함께, 길은 또 ‘마법’을 통해 그녀와 함께 조금 더 과거인 1890년대로 돌아간다. 오늘 날에도 ‘벨 에포크’로 불리는 그 시대 말이다.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로 가게 된다. 이 부분에서 연출되는 길과 아드리아나 사이의 대화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볼 수 있다. 1920년대라는 ‘현재’를 살고 있던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현재’ 시대에 염증과 공허를 느끼고,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시절’에 홀려버리게 된다. 여기서 드가와 고갱이 등장한다. 벨 에포크라는 '현재'를 사는 그들은 이 시절 또한 ‘아름다운 시절’이 아님을 말한다. 길과 아드리아나가 그들 각자의 ‘현재’에서 느꼈던 것처럼, 드가와 고갱은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에 살고 있음에도 그들의 현재인 이 ‘아름다운 시절’는 공허함만 가득하다고 하며, 르네상스 시대만이 아름다운 시대라고 표현하고 동경한다 -- 물론 르네상스도 그 이름에서 보듯, 그 자체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한 문명을 다시 (re) 탄생시켰다 (naissance)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드가와 고갱이 어떤식으로 벨 에포크를 표현하든, 아드리아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길이 다시 1920년대로 돌아가자는 제안에도 그녀는 가뿐히 거절한다. 이 때 길이 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약하자면, ‘항상 본인이 처한 현재는 공허하고 빈 것이다. 그렇기에 너에겐 벨 에포크가 영광과 낭만의 시대고 1920년대는 공허의 시대지만, 나에겐 2010년대는 공허의 시대고, 1920년대야 말로 영광과 낭만의 시대다’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가 중후반부 직전까지 보여준 인간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재확인함과 동시에, 현재가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에겐 가장 아름다운 시대라는 영화의 주제를 암시한다. 그리고 21세기로 돌아온 길은 파리에 눌러 살기로 작정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본 영화는 작가라는 특정 직업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정 직업에 한정되지 않고, 사람들은 종종 겪어보지 못했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와 동시에, 본인이 살아가는 오늘날은 텅 비었고, 철학이나 낭만도 없는 소위 말해 ‘죽은 시대’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비슷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령, 2022년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때때로 내가 살아왔던 19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시대는 낭만적이었으리라 생각하며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시대를 겪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모습도 보이곤 한다. 예를 들자면, 이웃간의 정, 나눔의 문화, 또는 컴퓨터도 익숙치 않고 (스마트폰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인간적인 가까움’을 느낄 수 있던 시대라는 환상화되고 낭만화된 이미지로 말이다.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나로서는 그 시대에 대한 이러한 낭만화된 이미지는 크게 공감되지 않는다. 그 시대는 마냥 낭만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나에게서도 나타난다. 나로서는,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1970년대나 1980년대에 환상을 부여하고 그리고 결국 낭만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두 세대가 각각의 전 시대를 그리워하는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라면 그 그리운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세대를 거듭하여 나타나는 연속되는 ‘그리움’들은, 즉 과거에 대한 ‘환상’들은 겪어보지 못함에서 온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영화의 감독은 성공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수작이다. 중반부까지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만의 시대를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더욱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길과 아드리아나의 대화를 통해, 결국 미래의 누군가에겐 우리가 사는 오늘이 가장 영광스럽고 낭만적인 시대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는 영광스럽고 낭만적이다라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희망적이다. 과거의 영광과 낭만에 그리움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도 그리고 이 시대도 아름다운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허와 암울을 느끼는 지난 몇 년간의 시간도 언젠가는 영광과 낭만적인 시대로 그려질 것이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