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을 때 비로소 가까울 수 있는”
한국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 즈음부터 컴퓨터 교육의 열풍이 시작됐다. 요즘엔 코딩을 배운다지만, 당시엔 얼마나 빨리 타자를 칠 수 있는지를 평가 받았다. 이제는 문서 작성프로그램의 저장 아이콘 모양에서나 그 흔적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플로피 디스켓을 사용해 파일을 저장하는 방법도 배웠다. 더 이상 오늘날의 교육과정에서는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이런 실습들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이메일 계정을 만들고 친구들과 서로 전자메일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해 낸 새로운 편지보내기 방식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누군가와 소통할 때 본명이 항상 필요치는 않은 것이었다. 이런 점은 곧 많은 ‘익명 채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익명으로서 상대 본연에 오롯이 집중하기도 했다. 동시에, 온라인 공간에서 사회적 본인이 드러나지 않는 그 순간에 사람들은 날 것 자체의 본인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의 개인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때때로 거리낌없이 솔직해지고 그리고 진실되기도 했다.
1998년 말에 개봉한 ‘유브 갓 메일’은 멀리 있을 때 비로소 가까워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영화 러닝타임 내도록 1990년대 말 뉴욕의 거리 곳곳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 존재했던 물건들이 대거 등장한다. 인터넷을 연결할 때 사용하던 모뎀, 브라운관 텔레비전, ‘최신’의 두꺼운 노트북과 같은 것들은 그 시절을 살았던 이들에겐 향수를 느끼게 하고, 그 시절을 겪지 못했던 이들에겐 그 시절만의 낭만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는 건 출연 배우들이다. 지난 수십년간 명연기를 펼쳐 온 톰 행크스의 익살스러운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대표 여배우였던 멕 라이언의 상큼발랄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본 영화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큰 즐거움이다.
오늘날 로맨틱 코미디는 종종 진부한 줄거리와 클리셰 범벅의 영화라고 치부되기도 하는 것 같다. 남녀 주인공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갈등을 빚다가, 결국에는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 말이다 –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이나 시답지 않은 않는 농담들도 이 ‘진부함’과 ‘클리셰 범벅’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들이 되겠다. 본 영화도 기본적인 플롯은 ‘로맨틱 코미디의 플롯’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풍부한 볼거리와 두 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전자메일이라는 방식으로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두 주인공의 애정이 커져가는 것에 집중한다면 영화 시청 내내 잔잔한 미소를 띄게 될 것이라 말하고 싶다. 영화 개봉 당시 전자메일과 익명채팅이 얼마나 ‘혁신적인’ 소통 방식이었는가를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면 영화 시청의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 영화의 줄거리 소개를 시작으로, 이 혁신적인 소통은 어떤 식으로 ‘멀리있음은 가까움을 가져다 주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남녀 주인공, 이 둘만으로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마지막 부분에 다다를 때까지는 마치 두개의 이야기가 있는 듯 영화는 진행된다. 캐슬린 켈리와 조 폭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채팅 아이디인 Shopgirl과 NY152의 관계로서 말이다. 온라인 세상에서 Shopgirl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캐슬린과 NY152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조는 일상처럼 서로에게 전자메일로 각자의 하루를 이야기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서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기로 하는 조건으로 매일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현실의 서로를 모른 채, 더욱 가감없이 자신의 일상과 느낌을 공유한다 –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일기장의 역할로 서로의 관계를 이어간다. 캐슬린은 뉴욕 어느 한 거리의 코너에 위치한 작은 어린이 도서 가게 주인으로, 일에 대한 자부심과 가게에 대한 애정으로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조 폭스라는 남자는 캐슬린의 가게 주변에 대형 서점을 오픈하게 되며, 캐슬린의 서점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고역을 겪기 시작한다. 이런 도중에 Shopgirl과 NY152는 함께 만나기로 하나, 조가 Shopgirl의 정체가 캐슬린임을 알게 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그녀를 바람 맞혀 버린다.
조는 조 폭스의 자아와 NY152의 자아에서 갈등을 느끼기도 하나, 캐슬린의 정체를 모른 체하며 그녀와의 대화를 지속해 나간다. 그러던 도중 결국 힘겹게 버티던 캐슬린의 가게는 폐점을 맞게 된다. 그녀의 정체를 앎과 동시에 그녀에게 이미 호감을 느끼고 있던 조는 그녀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며 조금 더 친밀하게 다가간다. 결국 정체를 드러내기로 한 조는, 조 폭스로서도 NY152로서도 캐슬린과 약속을 잡는다. 그 날은 성큼 다가왔다. 조 폭스와의 점심을 마치고 헤어지기 아쉽지만 캐슬린은 NY152와의 약속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녀는 만나기로 한 정원에서 조를 만나게 된다 – 그녀가 꿈꿔왔고 그리고 그녀가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NY152를 마침내 만나게 된다. 영화 내도록 담담히 서로 간의 애정을 보여줬던 두 남녀는 영화 러닝타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엔, (보는 시각에 따라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을 지라도) 영화 내도록 담백하게 진행되었던 점에 편안함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둘의 관계를 지켜보며 눈길을 끌었던 것은 조와 캐슬린 모두 전자메일에서 만큼은 서로에게 진실된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스스로에게도 솔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업가로서의 폭스가 아니라 그리고 대형서점 반대 시위를 이끄는 작은 서점의 켈리가 아니라, 조와 캐슬린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둘은 서로의 직업은 물론이고 이름도 모르는 ‘멀고도 먼 상태’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말 못할 고민들까지 털어놓게 된다 –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서로를 알 수 없는 가장 먼 상태였기에 각자의 고민들이나 생각들을 쉽게 털어 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들도 마음 깊은 곳에선 이런 관계를 원하지 않을까? 자신 그 자체를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고, 마음 속의 모든 고민과 슬픔을 털어낼 수 있는 관계 말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절실히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고독한 개인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을 생각했다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조와 캐슬린의 관계를 부러워하며 질투나는 미소를 지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로맨틱’의 의미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주인공 둘 사이의 신뢰와 조건 없는 애정을 그려낸다. 두 주인공의 관계에서 보듯, 아이러니하게도 ‘멀리있음에서 가까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자아나 사회적 치장이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을 때 비로소 가까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현실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가지기도 쉽지 않고, 이런 해방감을 느끼기는 더욱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은 각자에게 부여된 어느 정도의 쓸쓸함과 고독감을 안고 살아간다. 이렇듯, 때로는 씁쓸한 현실에서 인간이 그리는 환상과 낭만을 영화의 감독은 조와 캐슬린을 통해 그려낸 것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