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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Aug 16. 2022

V: "서양"음식을 먹다

 동양 그리고 서양

처음 마주한 서양


나도 계란 후라이 정도는 만들 줄 알고, 맵고 짠 맛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것이다. 혹시 서양 음식에 대한 글을 기대하고 왔다면 이 글은 서양 음식에 대한 글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이번 글에서는 '음식'이 아니라, '서양'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하려한다. 음식 이야기는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글을 읽어보기로 했다면, 우선 아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봤으면 한다.



살면서 처음 마주한 '서양'은 무엇이었는가?



          나에게는 음식이었다. 아주 어릴 때 가던 경양식 음식점은 특별한 날에나 가는 곳이었다. 그런 식당들에서는 여러가지를 팔았는데 유독 돈가스를 좋아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큰 쟁반 위에 넓적한 돈가스 덩어리 하나 -- 운 좋으면 두 덩어리 -- 그리고 '양배추 사라다'를 옆에 둔 음식이었다. 단지 맛있기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어렸던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서양'이었다. 이후에도 일상생활에서 '서양'은 불쑥불쑥 찾아왔다. 햄버거와 피자는 내 머릿속 서양음식의 대표주자였던 돈가스를 대신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입었던 양복정장 같은 교복도 나에게는 '서양'의 것이었다. 물론 동서양을 구분해주는 법도 없고, 자로 잰 듯한 규정도 없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나름대로 동서양에 대한 상상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채워졌다.



어디가 '서양'인지...?


성인이 되고 "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나만의 동서양 구분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 나의 상상과 달리 북미는 금발머리와 벽안의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었다. 몇 년 후 영국이라는 또다른 서양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도 돈가스를 매일 먹어대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구축된 상상의 "서양"은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개념으로서 생명을 이어가던 내 머릿속의 "서양"은 존재하기를 멈추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사실은 실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기를 멈추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서양'은 너무도 포괄적이고 애매모호한 표현이라는 것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침반을 두고 생각해도 서양이라는 표현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서양이라는 곳은 서쪽에 있는 곳이 아니었다. 종종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영국, 이 외에도 수많은 유럽국가들을 서양이라는 큰 카테고리에 넣어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한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미국과 캐나다는 동쪽에, 호주는 남쪽에 위치한다. 나아가, '서양'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나라들의 문화, 관습 그리고 역사적 관계를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이들을 서양이라는 애매한 범주로 묶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각자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이 있노라 주장하는 나라들을 볼 때면 과연 이들을 '서양'이라는 카테고리에 죄다 넣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북미와 유럽은 꽤 다르고 (심지어 상반되는 문화적 요소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캐나다와 미국이 다르듯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도 서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학창시절동안 열심히 구축했던 "서양"이라는 상상의 카테고리가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카테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동시에 "동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학과에서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경험은 나의 혼란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나의 생각은 '동양과 서양은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곳까지 이르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적인' 의미의 동양과 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동양과 서양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한 때 유럽에게 "동양"은 오늘날 중동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오늘날 미국에게 "동양"은 종종 동북아시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듯 시간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 상상의 개념은 여러가지 모습을 보이기도 해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이것들은 상상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돈가스가 서양이었듯, "동양"과 "서양"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상상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나아가 그것들은 곧 "현실"이 되곤 한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지만, 현실은 상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것들을 동양적인 것 혹은 서양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그렇게 구분된 것들을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어린 내가 생각한 서양의 큰 부분이 돈가스였던 것처럼.



'무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  


'"서양"에 사는 "서양인"들은 모두 돈가스를 먹을거야'라고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상으로 만들어진 일반화는 무의미하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득보다는 실이 많다 -- 상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화가 가져다주는, 소위 말해 "리스크"를 줄이는 것조차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미한" 생각들을 했다는 것을 되짚어 나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자리 잡은 '동양과 서양'의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은 '너와 나'라는 인식의 한 가지일 뿐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구분되어 왔던 '너'와 '나'의 구분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일은 특정 시대와 지역의 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여 구성된 사회는 어떻게 자신과 타자를 바라보았는지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옛날과 다를 것 없이 오늘도 지구는 수많은 분쟁과 복잡한 국제정치로 시끌벅적하다. 어느 시점이던 세계는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그 전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과 타자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역사학 전공자로서는 의미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적인 개념을 절대적인 개념으로써 사용해 왔던 과거를 추적해본다면 실타래처럼 꼬인 인간사를 풀어보는 것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동양식인지 서양식인지 알 수가 없다. 사실 그런 구분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아무튼 돈가스는 맛있었다. 생각은 변했는데 입맛은 그대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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