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애매모호한 시대구분하기
이번 글에서는 '옛날'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여기에 공개해보려고 한다.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종종 이야기하는 주제이다. 물론 답을 찾기 힘든 질문들이기도 하다. 그래도 꽤 흥미로운 질문이라 생각하여 온라인 공간에도 나의 생각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의 이야기는 '시대'와 그것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역사시간은 부작용 걱정 없는 수면유도제였다. 역사가 좋았던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 역사시간만 되면 유독 잠이 쏟아졌다. 아무튼 학창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역사교과서는 '고대, 중세, 근대' 등으로 단원들이 분류되었던 것 같다. 누가 그렇게 단원을 나눈것일까?
나는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고전학을 복수 전공했다. 시대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역사학과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서양사* 커리큘럼에 국한하자면, 역사학과는 대략 기원후 11세기정도부터** 현대까지 관련한 다양한 역사과목들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11세기 이전의 역사는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고전학과***에서 가르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주워듣고, 그렇게 고전학을 복수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곳에서도 가르치는 시대의 범주는 존재했다.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후 5세기 초반정도까지 가르쳤다. 바로 이 때 나의 첫 궁금증은 시작되었다. 도대체 5세기부터 10세기는 어디에서 배우는 것일까? 이 시기는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어느 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역사학과에서는 이 시기를 고대의 끝자락으로 여겼으며 고전학과에서는 이 시기를 중세의 첫 부분으로 보았다. 그래서 5-10세기는 갈 곳 없는 신세에 처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우스갯소리는 이후 수많은 질문들을 낳아대기 시작했다.
사학과 전공과정 중에 종종 관찰하게 되는 것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옛날'이라는 표현을 쪼개대는 것이다, '시대'라는 이름이 붙은 큰 덩어리로 말이다. 여기에서는 고대/중세/근대 등의 이름이 붙여진 것을 말한다 -- '르네상스 시대', '대항해 시대'식의 이름 구분은 이 글에서는 제외하기로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서양사의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것이 고대, 중세, 근대 등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예시가 있다. 누군가는 4세기 초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것을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보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그 분기점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중세의 끝으로는 백년 전쟁, 30년 전쟁 등이 꼽히는 경우도 있는데,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분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이후의 시기 또한 잘게 쪼개지는데, 예를 들자면 2차세계대전의 종전도 시대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이 분기점에 대한 질문은 나를 괴롭혀댔다. 소위 말하자면, 정확한 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의 답만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준은 항상 달라지는 것이며, 그것은 당연한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특정한 필터 (정치적 관점, 문화적 관점, 경제적 관점 등)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은 분기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구분하는 작업에 관련해서는 상대적인 상태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이 든 이후로부터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더이상 나를 괴롭히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재미가 되어 갔다.
이 질문은 권위라는 개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의 처음에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교과서의 단원들은 소위 말해 '전문가 (각 분야의 전공자; 역사학의 경우에는 역사학자나 역사학 교수들을 일반적인 예시로 들 수 있다)'들에 의해 구성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가 가능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 책이 쓰여지는 (혹은 그 단원들이 구성되고 있는) 장소와 시점의 정치적/시대적 요소가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말하고 싶은 점은 상대적인 상태는 항상 지속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각자의 학문적 배경이나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각각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간략한 예시를 다시 한번 재사용하자면 가령 백년 전쟁이라는 사건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학자의 경우, 이 전쟁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라 주장할 수 있다. 정치/시대 (보통 이 두 개의 요소는 함께 작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적 요소에 집중해보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어느 한 사회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시대 구분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경우는 현대와 그 전의 시대를 구분할 때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현대'와 '전근대적'이라든가, 그런 표현들 말이다.
'누가 시대를 구분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이따금씩 할 때 나는 '우리는 한 번쯤 이렇게 나누어진 시대에 의문을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한다. 바로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어느 한 역사적 사건 그 자체는 어떻게 시대와 시대 사이의 분기점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구분(들)은 누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즉, 시대마다 벌어지는 '시대구분'이라는 행위는 그 구분이 행해지고 있는 시점의 여러가지 요소 (개인적 배경, 정치/시대적 배경 등)가 많이 작용한다. 말하자면, 어떤 '권위' 같은 것이 특정 '지침'같은 것을 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정한 방식의 시대구분이 이루어진 배경에 의문을 품어보면서 나만의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다시 해보는 것은 소소하지만 꽤 재미있는 반항인 것 같다 -- 비슷한 악취미(?)는 서점에 갔을 때도 자주 발생한다. 다양한 책들의 카테고리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이다, 가령, '백년 전쟁은 전쟁사, 유럽사, 영국/프랑스사 중에 어디에 꽂혀야 하는가?' 같은 질문말이다.****
시대구분을 하다보면 시대라는 것은 꼭 계단식으로 변해가는 것만 같다. 컴퓨터 게임 하나를 예시로 들고 싶다. 아주 옛날 게임을 예시로 들 수 밖에 없음을 우선 감안해주었으면 한다. 나의 예시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라는 게임이다. 어느 특정 문명을 고르고 나면 게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문명을 가꾸다보면 '발전' 따위의 버튼을 클릭하여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철기시대가 갑자기 중세시대로 바뀌고 그리고 근세 등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게 되면 내 문명에 속한 건물이며 사람 등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게 된다. 이것은 내 눈을 즐겁게 해주던 게임의 한 요소였다.
게임과 달리, 실제 세계는 절대로 저런식으로 "짠"하고 바뀌지 않는다. 즉, 고대, 중세, 근세 등은 마치 계단 올라가듯 단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는 스펙트럼적이라는 것이다. 이번 예시는 전 유럽을 흔들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가받곤 하는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존재하던 사람들은 이후에도 존재했다.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사건이었지만 그 전에 존재하던 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새로운 사회"를 채울 구성원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인식될 때가 있지만, 사실 사람들은 조금씩 바뀌었다. 한번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 (변화하는 기간이 길 때도 있었고 짧을 때도 있었다) 다음에 다가올 시대에 서서히 스며들어 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면 쉽게 실수하고 착각하는 부분인 것 같다. 전공자가 아니라도 '옛날'을 구분하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되는 습관인 것 같기도 하다. (임의로 나뉘어진 것이지만) 각 시대의 특징을 살피는 것은 조금 단편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가 바뀔 때, 과도기 -- 시대가 임의로 정해지듯 이 과도기라는 것도 하나의 시대이며 이 시대도 임의로 정해진다 --라 생각되는 시점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게다가 '과도기의 사람들'이 그 과도기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며, 나아가 과도기를 직접 꾸려나가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알아갈 때면 인간사의 무한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시대'라는 것을 접하게 되면서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것들 중 몇가지를 여기에 공개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어떠한 것들이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느냐?"와 "그 구분은 누가/무엇이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 상대적인 것만이 절대적으로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생각에 다다를 때면 "이러한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유효한 것일까? 시대구분이라는 사고활동 자체를 어떠한 방식으로 봐야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물음을 던지게 된다. 결국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한다.
'시대'라는 것에 관련한 질문들과 생각들은 나를 괴롭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괴롭힐 것이지만), 어쩌면 이 괴로움은 역사학을 배우는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관점들과 해석들을 제시하고 공유하는 것이 역사를 접하면서 느끼게 될 즐거움일 것이다. 다양한 타인(들)의 생각들을 알아가고, 나아가 그 이유를 추적해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 글을 마무리 할 즈음에 든 생각은 이러하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하려 항상 노력해보지만, 사실 정리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들은 계속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너무나 글이 길었다. 여전히 꺼내지 못한 이야기도 있다. 가령, "고대, 중세, 근대" 같은 용어의 문제점, 그리고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것 (예를 들어, 정치적 혁명과 경제적 발전 등은 종종 함께 작동하는 것) 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루기에는 '정리되지 않은'상태는 커녕 희미하기만한 나의 생각들 때문이며, 무엇보다 더 큰 이유는 그것까지 떠들어댄다면 정말이지 이 글은 완독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까지 읽어주신 것에 많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참조
* 서양사라는 단어로 일축하여 표현하였지만, '서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낳는다. '서양'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을 나열한 글이 있다. 이 글은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에 대한 내 생각을 정제없이 쏟아낸 글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관심을 갖을 분들을 위해 링크를 아래에 남겨 두었다.
https://brunch.co.kr/@scripsi/14
** BC 와 AD: 분명 어디에선가 기원전/후를 가리키는 말로 이 용어들을 보았을 것이다. BC는 Before Christ, AD는 ANNO DOMINI를 가리키는데, 각각 예수탄생이전이라는 뜻과 예수가 탄생한 해 (직역: 주의 해)라는 뜻이다. BCE와 CE라는 용어도 앞서 설명한 두 용어를 대체해서 쓰인다. 각각 Before the Common Era와 Common Era를 줄인 용어이며, 종교적인 느낌을 희석하고자 쓰이기도 한다.
*** 이 학과에서 라틴어를 학습하게 된다. 고통스러웠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애증의 라틴어'이다. 이와 관련한 글의 링크도 아래에 남겨 두었다.
https://brunch.co.kr/@scripsi/7
**** 책장에 무수히 꽂힌 책들을 보면 이들은 제대로 된 카테고리에 꽂혀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관심이 있을 분들을 위해 링크를 아래에 남겨두었다. 관련 글은 이 글보다 짧다. 그래서 읽는데 들이는 시간도 길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