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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Jun 19. 2022

II: 애증의 라틴어

즐거웠던 문법 지옥

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등을 비롯한국에서도 라틴어 어렵지 않게 찾아   있다. 라틴어 문구는 여러 대학교의 교훈으로도 쓰일 뿐더러, 타투 레터링에도 이따금씩 쓰인다. 물론, 상품 이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때 최고급 차의 대명사였던 에쿠스도 "말"(horse) 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일상에서 라틴어로 이름 붙여진 것은 꽤나 "있어보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근현대 유럽사 전공자와 고대 라틴어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물론 복잡하기 짝이 없는 라틴어 문법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할 생각은 결코 없다. 그 양이 너무나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지루한" 얘기를 시작이라도 한다면 이 글은 여기까지만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에 있는 어느 한 대학 벽에 낙서된 라틴어: PULCHRA SEMPER ("항상 아름다워라!")



라틴어 학습의 고역


           나는 라틴어를 왜 배우기로 했을까? 라틴어는 나와는 전혀 상관 없어보이는 언어였다. 대학교를 다니던 당시, 고대 그리스/로마 역사 개론 수업을 수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라틴어 (혹은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큰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정작 라틴어의 필요성은 전공도서를 읽으며 느끼게 되었다. 고대 로마인은 다 죽고 없는 근현대를 다루는 유럽근현대사 책에 라틴어가 뭐가 그리 많이 나오던지! 라틴어는 마치 고사성어처럼 자주 등장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라틴어 문구들은 나의 독해능력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고, 결국 라틴어를 울며 겨자 먹기로 배우기로 했다. 라틴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전공서를 조금 더 빨리 이해하고 넘어가고자 했던 목적이 컸다. 당시의 라틴어 학습은 부족한 나의 읽기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amo ("I love") 에 대한 라틴어 동사 변형. 이 동사의 변형은 여기에 보이는 것 만큼의 양이 하나 더 존재한다. 당연히 모두 외워야 한다.

          라틴어 수업을 들은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아,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끝 없는 동사변형의 굴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명사와 동사에 함께 적용되는 남성/여성/중성의 구분은 머리가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한국어에는 없는 관사 (영어의 'a' 와  'the')가 라틴어에도 없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수월할 것이라는 희망도 산산조각이 났다. 관사가 주는 문장의 명료함을 라틴어는 세세한 문법 규칙을 통해 문장을 명료하게, 동시에 간결하게도 표현했다. 수많은 규칙적인 변형의 향연과 더불어, 종종 나타나는 불규칙 변형은 라틴어 학습의 "풍미"를 더해주었다.


          그래도 반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자 더듬더듬 읽게 되었다. 조금 익숙해지려하니 로마의 정치인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키케로가 2000년이 넘어 내 눈 앞에 환생하여 나타났다, 라틴어 학습자에게는 말그대로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로서. 비유적 표현과 화려한 문장력으로 장식된 키케로의 글을 마주할 때면 그나마 더듬더듬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지식은 무용하게 되었다. 당대 로마의 시인이나 정치인이 썼던 글을 해석하다 보면 '나는 무엇을 배운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고대의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스도쿠를 푸는 느낌까지 들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작품들을 접해갈 즈음에 나의 라틴어 학습은 끝이 났다. 라틴어에 꽤 재미를 붙일 즈음에 세웠던 '라틴어를 부전공으로 삼아야 겠다'는 목표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더이상 라틴어를 흡수하기에는 뇌에 과부하가 찾아왔고, 무엇보다 졸업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라틴어 덕분에...


          학습 당시에는 고통이 동반되었지만 사실 라틴어 학습은 결과적으로는 유용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심지어 꽤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우선 다행스럽게도 처음 목표했던 것에는 도달을 했다. 얕디얕은 라틴어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전공서에서 예고 없이 등장하는 라틴어 문구가 낯설더라도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게 되었고, (용감하게도!) 나 또한 글을 쓸 때 아주 가끔씩 라틴어 문구를 집어 넣고는 했다. 대학시절 복수전공이었던 고대사를 학습함에 있어서 내용의 이해가 수월해졌음은 물론이었다. 근현대 프랑스사 전공자로서 프랑스어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에게 라틴어는 프랑스어를 이해하는 것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럼에도 혹시 프랑스어를 배우려 한다면 라틴어 학습은 생각치 말고 프랑스어만 배우기를 추천한다 -- 추측하건대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 등의 다른 로망스어를 배우는 점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실질적인 도움을 얻음은 물론이고,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꽤 재미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온 고사 같은 것은 라틴어로 자주 표현되어 있는데, 라틴어 문구와 그 문구의 유래를 더듬어가며 관련된 역사나 문학을 찾아가는 여정은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나아가 적지 않은 라틴어 표현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볼 때면 라틴어는 사어(죽은 언어)가 아니라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럴 때면 살아 숨쉬는 역사를 느끼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또한 "고역"이라고 표현했지만, 수많은 고민들을 느낄 때면 이 "알파벳 스도쿠"같은 복잡한 언어를 알아가는 것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계획에 없는 일은 고통을 안겨줄 때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좋을 때가 있었다. 예상에도 없던 라틴어 학습의 짧은 기간동안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신선하고도 즐거운 만남이었다. 지나고보니 대체로 다 좋았다. 라틴어 문법지옥의 고통조차 지금 생각해보니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일에서 즐거운 새로움은 찾아왔다. 라틴어와의 만남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것이 다시 나에게 오기를, 그리고 즐거움이 가득한 새로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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