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기는 번역가를 대체할 수 없다.
번역기가 발전을 거듭할 때마다 번역가는 과거에만 존재하는 직업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번역기를 때려부수며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하루 빨리 진행해야만 하는 것일까? 결국 번역기에게 인간은 항복해야 하는 것일까?
러다이트 운동: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여러 사회/문화적 현상을 초래했다. 노동자의 삶이 궁핍해진 것이 그 중 하나이다. 19세기 초기, 영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여 섬유를 만드는 기계를 파괴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노동운동의 의지를 보여주게 된다. 오늘날에는 인간을 대체할 무언가 (보통 기계나 신기술)에 대한 반대의 의지를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쓰인다.
한 번쯤은 "완벽한 번역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적이 있는가? 그런 생각이 한 번만 스친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여느 기계의 발전처럼 번역기의 개발도 꾸준해 왔다. 요즘은 번역기에도 인공지능 — 이 분야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어려운 단어 — 을 적용하여 더욱 편리하게 만드려는 시도도 많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번역기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왜 사학과 대학원생이 갑자기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지 간단히 소개하며 이번 회를 시작하려 한다.
별 것 아닌 것에 우쭐해지던 사춘기였다. 그래서인지 특별하지도 않은 것에 작은 성과라도 낼 적이라면 그것이 내 인생의 적성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사회' 과목에서 서양사를 처음 접했다 (이제 나의 나이를 추측할 수 있다 -- 아무도 관심은 없겠지만). 많은 과목들 중에서 가장 덜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마침 치렀던 시험도 쉽게 출제가 되었던지 점수가 잘 나왔다. 이것은 사춘기 소년의 자만심으로 이어졌고, 곧장 우쭐해져서는 사학과에 가기로 했다. 사학과가 정확히 뭔지도 몰랐지만, 다른 과목에 도통 재능이 없는 것과 더불어 사춘기 소년의 고집은 몇 년 뒤 사학과 진학으로 이어졌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중/고등학교 때 그리던 환상과 다소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꿈꾸던 곳에 도착했을 때 생각하던 것과 마주한 현실이 적잖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며 짐짓 놀라게 되는데, 나도 이 법칙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내가 도착한 "환상의 세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다. 본격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사료를 골라서 읽어낸 뒤 분석하는 일이 그 중 한가지였다. 그 중심에는 외국어가 있었다. 그렇게 번역은 내가 하는 일의 한 부분이 되었다.
"완벽한 번역기"가 있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본인이 번역을 해야했다. 많은 이들처럼 나도 "완벽한 번역기"가 나오길 기원했지만, 얼마 전에 든 생각은 결국 번역은 인간의 업무에 머물 것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른 이유는 간단했다. 셀 수 없는 사료들을 보며 어떤 사료를 선택할 지를 고민하다보니 번역도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중요한만큼 무엇을 번역할지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왜 번역기는 번역가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는가?
번역을 할 때는 많은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야만 한다. 보통 기술적인 어려움을 꼽으며 기계가 대체하기 어렵다고 한다. 말하자면, 뉘앙스나 맥락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다면 우선 한국어에서 쓰이는 미묘한 표현, 속담이나 관용어 등은 말할 나위 없고, 각 시대마다 쓰이던 표현까지도 능숙하게 알아야 한다. 특히 이 점에서 맥락의 중요함은 더욱 커진다. 주어진 텍스트의 맥락도 알아야 하지만, 나아가 번역을 해야 하는 텍스트가 쓰여졌던 시대적 맥락도 이해해야 한다. 시작언어인 한국어를 이해했다면 이제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도 앞서 고려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미 번역기는 번역가를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이야기한 문제들을 기계가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더 큰 장벽이 나타난다.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부터는 번역가 개인의 주관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적어도 역사의 분야에서는 그런 듯 보인다.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호칭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황제들은 ‘황제'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황제라고 불렸던 적도 없었음 (심지어 불리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에도 황제라 불리고, 또다른 이들은 당시에는 황제였어도 오늘날에는 황제라는 호칭이 뺏긴 경우도 있다. 국명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지난날 꽤 많은 정치적 구성체는 자신을 '제국'이라 이름 짓거나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만,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에는 사회/역사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치적인 관점에서 주관적 판단이 들어가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다른 문제점도 존재한다.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번역할 때 자주 생기는 문제일 것이다. 특히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 같은 경우에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번역가가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야 하는 것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주관적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에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 번역이다.
앞서 말한 모든 것을 넘어, "완벽한 번역기"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제 밝힐 이유 때문이다. 번역가의 중대한 업무는 어떤 것을 번역할 지에 대한 결정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번역가라는 직업 자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것을 번역할 것인지는 어떤 특정 지식을 다른 언어 -- 즉, 다른 "세계" -- 로 옮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번역가는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결정권을 보유하고 있다. 하나의 개인이 어떤 것을 번역할 지 혹은 번역하지 않을 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이것이 번역하는 ‘사람’과 번역하는 ‘기계’의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가는 단순히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뉘앙스 정도만을 고려해서 능수능란하게 말을 옮기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가는 무엇을 번역할 지 결정하는 시작점부터 수많은 결정을 내려가며 번역을 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개인, 즉 인격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학자들이 사료를 고르고 분석하는 행위는 흘러간 세월에서 어떤 것들을 ‘역사’로서 이름 붙일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번역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들이 어떤 것을 번역하는 것인지는 무엇을 지식으로, '앎'으로 전달할 지를 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번역이라는 것은 기계가 완벽히 해낼 수 없다. 번역은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어떠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이 잘 되었는지를 판단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활동이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이유로 번역을 하였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결론은? 번역가는 러다이트 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